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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시끄러운 나라, 조용히 떠나신 박숙이 할머니
그때 할머니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꽃같은 나이였다. 바닷가서 조개를 캐던 소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의 시퍼런 서슬에 저항도 못하고 끌려갔다. 일본 나고야를 거쳐 도착한 곳은 중국 만주 위안소. 소녀는 그곳에서 지옥을 겪었다. 자기 이름 ‘숙이’ 대신 ‘히로꼬’라 불렸다. 악몽같은 6년.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은 시간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94) 할머니가 6일 저녁, 고향인 경남 남해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박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39명으로 줄었다. 이튿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1260차 정기 수요집회에 할머니 영정이 놓였다. 하지만 세인들은 할머니의 죽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상은 오로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에 시끄러웠고, 그 진흙탕 속에 할머니의 죽음은 조용히 묻혔다.

해방이 되고도 돌아오지 못했던 할머니는 서른이 넘어서야 고향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죄인마냥 자신의 과거를 입밖에 내지 못했다. 다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행여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까 두려웠다. 하지만 손주들까지 모두 장성한 뒤엔 용기를 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었다. 여든 여섯이 되던 해였다.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후엔 누구보다 열심히 ‘위안부’ 명예와 인권을 되찾는 데 앞장섰다. 2013년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 조정을 국내 법원에 첫 신청했고, 학생들에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며 지역학생들을 찾아가 강연을 펼쳤다. “나라 없는 설움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할머니는 어린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작년엔 고향 남해에 ‘숙이 공원’이 생겼다. 할머니의 모습을 딴 ‘평화의 소녀상’도 그 안에 세워졌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소녀상 옆엔 바래(조개 캐기)를 상징하는 소쿠리와 호미가 놓여 있다.

할머니가 떠난 다음날, TV에선 하루종일 최순실 청문회가 생중계됐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 연신 고개를 가로젓는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온 종일 전국민 앞에서 기억상실증을 자랑하고 있다. 정작 망각의 약이라도 삼키고 싶은 할머니들은 끔찍한 기억이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들은 몇 달 전 일도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다.

열여섯 소녀가 그렇게 돌아오고 싶었던 나라는 지금 너무도 어지럽다. 한발짝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다.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나라가 가장 시끄러울 때 떠난 할머니가 애달프다. 이번주 토요일, 일곱번째 촛불집회에 나서는 시민들은 가슴 속에 흰 국화 한 송이씩 품었으면 좋겠다. 삶 자체가 대한민국 역사였던 박숙이 할머니를 그렇게라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anju101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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