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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범국 딱지떼자”…아베, 오바마의 고향ㆍ국제정세 적극 이용해 ‘진주만 방문’ 추진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전후 정치의 총결산에 도전하겠다”

1982년 취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 총리의 발언이 아니었다. 5일 저녁 국회의 자민당 총재실에서 열린 당 회의에서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총리가 한 발언이었다. 2시간 뒤 아베는 기자회견을 통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26, 27일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해 희생자를 위령하겠다고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의 단초가 된 현장을 일본 총리 사상 처음으로 방문하겠다고 밝힌 것이었다. 

[사진=게티이미지]


이른바 ‘전후체제 탈피’를 위한 아베의 진주만 방문 계획은 올해 중순부터 비밀리에 진행됐다. 지난 5월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한 이후 마지막 미일 정상회담 방법을 고민하던 아베는 외무성의 모리 다케오(森健良) 외무성 북미국장을 통해 비밀리에 진주만 방문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계획을 아는 것은 국장을 포함한 소수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미일동맹 강화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회담을 노린 아베는 하와이가 오바마의 ‘고향’이라는 점을 이용했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이후 “마지막에 어울리는 회담을 하고 싶다”라며 오바마 고향인 하와이 오하우 섬에서 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다. 하와이에 ‘들린 겸’ 진주만을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었다. 산케이는 아베가 지난 6월 기자회견에서 진주만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시나리오는 이때부터 짜여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지난 8월 아베 아키에(安倍 昭恵) 일본 영부인이 진주만을 방문한 것도 자국 여론과 미국 분위기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아베는 무엇을 위해 진주만 방문을 추진한 것일까. 산케이는 본래 아베가 추진한 진주만 방문일자는 12월 8일(도쿄 시간)로, 정확히 75년 전 진주만 공습이 발생한 날이었다. 아베 총리가 필생의 과업으로 꼽는 ‘전후체제 탈피론’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으로서 ‘전범국’ 딱지와 군사보유 불법화가 된 일본의 입지를 전면 개선하자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헌법 개정을 통해 군사보유가 합법화되는 ‘보통국가’가 되고 적극적인 국제 원조와 안보동맹으로 ‘전범’이 아닌 국제사회를 이끄는 주요국의 입지를확충하자는 것이 전후체제 탈피론의 핵심이다. 한 자민당 간부는 아베가 지난 5일 도내 스테이크 가게에서 식사를 하다가 돌연 “(지금이) ‘전후체제’를 구별할 수 있는 딱 좋은 기회”라고도 말했다고 전했다. 

지난 8월 혼자서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해 75년 전 기습공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온 아베 아키에 여사.   [사진=겐다이(現代)비즈니스]


전후체제 탈피를 위해서는 ‘화해 외교’가 동반할 수밖에 없다. 아베는 전후체제 탈피를 위해 최근 흔들리는 국제 안보구도를 적극 이용했다. 중국과 직접 패권경쟁을 벌일 힘이 약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결국 지난해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를 개정해 일본에 동맹국의 안보를 전수방위할 명분을 줬다. 기회를 잡은 아베는 같은해 9월 비상사태 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안보 관련 제ㆍ개정 11안을 통과시켰다.

아베는 이른바 ‘화해 외교’를 펼치고 있는 미국 및 2차 대전 승전국들의 상황도 적극 이용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해역사적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베트남과 쿠바를 잇따라 방문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득세를 견제하기 위해 어제의 적이었던 국가들과 손잡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특히 오바마는 베트남을 방문해 무기 금수를 전면 해제하고 베트남 전쟁 당시 살포된 고엽제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다만 오바마는 전쟁 피해자들을 돕는 것이 “미국의 윤리적, 인도주의적 의무”라고 말했다.

아베 역시 이러한 국제사회의 논리를 적극 이용해 지난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냈다. 위안부 합의는 일본의 법적 책임이나 배상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국은 즉각 “환영한다”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강하면사과를 받고 아니면 하지 않는다”라는 국제사회의 논리를 인정한 것이었다. 외무성 소식통은 이 때문에 “오바마가 사과를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에 “(진주만 공습을)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지난달 아베가 트럼프와 회담하자 수잔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오바마에 정상회담을 적극 만류했다. 산케이는 지난 11월 중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에서 오바마와 아베가 잠깐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도 라이스 안보보좌관이었다고 설명했다. 만약 마지막 미일 정상회담 장소가 이전된다면 아베의 진주만 방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소식통은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ㆍ닛케이)에 “트럼프가 당선되면 직접적인 ‘사과발언’을 요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도 설명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친절했다. 산케이에 따르면 오바마는 일정을 적극 추진하는 아베에 “내가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며 진주만 합동 방문 계획을 수용하기로 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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