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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해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따스하고 강한 여인들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두렁박에, 시름을 달래주던 노래가 있으면 큰 돌고래 거북과 마주하던 컴컴한 바다 속도 무섭지 않았어요.”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흑백 사진에 적힌 소녀 해녀의 한 마디는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칠성판(시신을 덮는 관의 나무 판)을 등에 지고, 명정포를 머리에 이고, 저승길이 오락가락하는…”,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
[사진=해녀의 아침]

해녀들의 민요와 속담에는 장례 때 쓰는 물건이 자주 등장한다. 해녀가 산소통도 없이 2분 가량 잠수해 작업을 벌인뒤 다시 수면위로 나와 내뱉는, 쇳소리 섞인 거친 호흡 ‘숨비소리’는 생명의 의성어이다. 제주해녀의 물질은 죽음을 각오한 사투였다.

힘든 과정이기에 15~17세 무렵 애기해녀를 거친 잠녀(潛女)들에게는 폐활량, 수압에 견디는 눈과 귀, 저체온증을 이겨내는 강인한 체력에다 거대한 바다생물의 갑작스런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는 강심장이 요구됐다.

이처럼 해녀문화의 외양은 치열한 생존 투쟁이다.

해녀문화의 내면은 우정, 사랑, 나눔이었다. 나아가 다양한 노동요와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같은 수중 예술 ‘잠수굿’을 낳는 등 공동체 민속예술의 창달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나눔과 사랑이다.
[사진=해녀의 점심]

집집마다 생계를 이어가야 하지만, 어떤 이는 어리고, 어떤 이는 늙었고, 어떤 이는 체력이 약했다. 어획량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지만, 베테랑 해녀들은 물질을 끝낸 뒤 어린 소녀나 할머니의 망사리에 슬며시 미역 전복 소라 등을 한 웅큼씩 넣어주었다. 이 나눔은 ‘개석’이라는 제주 풍속 용어로 정착됐을 정도로 늘상 벌어지던 풍경이었다.

공동 물질 구역을 두어 공적 기부에도 나섰다. 이를 ‘바당’이라 부른다. 제주에는 최근까지 ‘학교 바당’, ‘이장 바당’이 운영되고 있다.

폐교 위기에 있던 성산 온평초등학교를 부활시킬 때, 해녀들은 ‘학교 바당’을 운영했다. 생업을 위한 조업을 마친 다음에는 정해진 해역에서 ‘추가 근무’를 한뒤 이를 모두 학교 재건 기부금으로 냈다.

마을 운영을 해야하기에 이장을 선임하고 그 이장은 원할한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필요하는 심부름을 했다. 이장은 해녀와 어부들의 지원 업무에 골몰하느라 조업을 하지 못한다. 이장네집 생계를 위해 해녀들이 추가 근무를 한 해역을 ‘이장 바당’이라 부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중략)...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갑니다’
[사진=물질 끝내고 수면위에 박차고 올라오는 해녀]

날씨가 궂어 물질을 하지 못하는 날엔 여자였고, 엄마였다. 애기 엄마 해녀는 ‘섬짐 아기’ 동요의 내용과 꼭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풋감 즙을 묻혀 ‘갈옷’을 만들면 오래 입고 습기에도 강하다는 점을 알았고, ‘원양 물질’을 위해 태평양 연안의 ‘콘키티’호를 닮은 뗏목배 ‘태우’를 고대부터 쓰고 있었다는 점은 제주해녀의 지혜와 창의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강하고, 제주 해녀는 더욱 강했다.

해녀들은 일제 수탈에 반발, 1931~1932년 구좌, 성산, 우도를 중심으로 238회에 걸쳐 연인원 1만7000여명이 저항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네스코가 1일(한국시간) 전 세계인들에게 귀감이 될 제주 해녀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어찌 보면 늦었고, 이제라도 그 희생과 사랑을 세계인들이 따라배우게 된 점에서는 다행이다.

함영훈 기자/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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