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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는, 왜?]국민의 무관심ㆍ국가주의 내각ㆍ일왕제가 낳은 日 부패역사…한국에 묻는 것은?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1976년 당대 최악의 정치스캔들인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전 총리는 사상 처음으로 검찰에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다시 국회의원이 됐다. 다나카 전 총리뿐만이 아니다. 1988년 리크루트 사건때 연루된 정치인들도 다시 요직을 차지했다. 2000년 이후 일본 정계의 부정부패 사건은 최소 5건에 달한다. 세계경제 3위를 자랑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채택한 일본에서 부정부패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카나 전 총리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인식은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2015년 NHK가 진행한 ‘전후를 상징하는 인물’ 설문조사에서 일본 국민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1위로 꼽았다. 재임기간이 2년 4개월밖에 안됐지만, 그는 현재까지 일본에서 ‘이상적인 리더’로 꼽힌다. 국민들이 그를 영웅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일본열도개조’(국토균형발전)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富)를 일본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분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이 자신 비리를 무시해준 덕분에 다나카 전 총리는 대놓고 부패를 저질렀다. 다나카가 끌어다 모은 자금은 집권여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장기집권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이 됐다. 정경유착도 이때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진=록히드 사건 당시 마이니치 신문 기사]




이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등에 업고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과 유사하다. 국민들에게 박 대통령을 둘러싼 측근 및 자질 논란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결과, 대통령이 검증되지 않은 민간인에게 연설문에서부터 국정, 예산까지 권한을 위임하는 초유의 국정논단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의 무관심, 부패의 역사를 만들다= 국민의 무관심은 부패를 낳는다. 반복되는 부정부패 속에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공기업 도쿄전력의 은폐사실이 드러났다. 역대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지만 2012년 중의원 선거 투표율은 52.66%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이때 아베 신조가 새 총리에 올라 자민당이 재집권에 성공했고, 요쓰가 다카시 국토교통 정무관, 야자와 요이치 경제산업상, 모치즈키 요시오 환경상, 아마리 아키라 전 경제재생담당상 등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사임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아베 총리는 현재 역대 최고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도 현재까지 일본의 ‘영웅’으로 꼽히고 있다. 1988년 ‘리크루트 스캔들’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아베 신타로(아베 신조 현 총리의 부친) 관방장관 등 78명의 정치인이 연루됐지만 자민당은 집권여당의 자리를 지켰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일본 국민이 전국적으로 반발했지만 같은해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은 대승을 거뒀다. 



[사진=인크루트 사건으로 압수수색에 나선 도쿄 특수부. 당시 78명의 정치인들이 연루됐다.]




일본 국민의 정치 무관심은 일본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민주화는 시민 저항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히 엘리트의,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를 위해 민주화가 진행됐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자 하토야마 이치로를 비롯한 일본의 고위계층인 ‘화족’세력은 재빨리 정당을 창당해 위기를 모면했다. 일본의 주요 정당인 자민당과 민진당 모두 화족세력이나 그 자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정당이다. (하토야마 이치로가 자유민주당을 창당하고 요시다 시게루가 첫 총리가 됐다.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은 하토야마 이치로의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가 세력을 모아 창당했다) 간혹 ‘자수성가형’ 일반가정 혹은 농가 출신의 정치인이 등장했지만 - 그리고 다나카 전 총리가 그 대표사례였지만 - 이들도 정치 엘리트들이 누리는 특혜에 심취해 각종 이득을 취했다. 다나카 전 총리는 “정치는 곧 머릿수고, 머릿수는 곧 힘이며, 힘은 곧 돈이다”(“政治は数であり、数は力、力は金だ”)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더구나 1870년 자유민권운동도, 1920년 다이묘 데모크라시 운동이나 전후 민주화 운동도 정부에 제압당했다. 전제권력에 대항한 최대 규모의 시위였던 치치부 민중봉기도 일주일 만에 제압당했다. 2011년 반핵시위가 일어나기 전까지 전후 최대 시위였던 1960년 안보투쟁도 마찬가지다.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여론의 반발에 부딪쳐 사퇴했지만 1960년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이 296석을 확보해 압승을 거뒀다. 국민 스스로가 안보조약 개정을 승인해버린 꼴이 된 것이다. 



[사진=반(反)재일한국 정서를 띠고 있는 ‘재일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 시위현장. 재특회는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 번영을 그리워하는 시민들로 구성됐다.]



쓰라린 ‘패배’의 기억은 일본 국민들이 정치세력의 ‘지배’를 받는 정치문화가 만들었다. 교사가 기미가요를 기립제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봉 처분받거나 부당대우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가 하면,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퇴위 소식에 “국민을 위한 희생이 너무 크셨다”라며 울먹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보수주의자 중에는 마사코 왕세자비가 나루히토 왕세자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괘씸하다”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사진=1960년 안보투쟁]




도쿄대학교의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2005년 서울대학교 특별강연 자리에서 “‘전후 60년’이 되는 올해, (일본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일본의 시민사회는 과연 한 번이라도 민주적인 가치를 진정하게 자기 것으로 만든 적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밖에 없는 지점에 서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1946년 11월 3일 헌법 공포로 ‘민주체제’를 구축했지만, 정치인이나 일본 국민 모두 메이지 시대의 황국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다는 지적이었다.

▶ 고인 물은 썩는다…장기집권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고인 물이 썩듯, 장기집권한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를 견제할 장치가 없으면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집권여당인 자민당은 50년에 걸쳐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정책으로 정ㆍ재계인사들이 긴밀하게 협력하는 정경유착이 심화됐다. 1988년 인크루트 사건, 1993년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뇌물수수 사건, 그리고 지난해 발생한 아마리 아키라 경제재생담당상의 뇌물수수 사건 모두 재계와 연관된 부패스캔들이었다.

민주당이 일시적으로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뤘졌지만 마찬가지였다. 2008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위장기부 논란과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의 불법정치자금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도 정경유착이 문제였다. 특히 일본의 전경련인 ‘게이단렌’은 일본 정계 인사들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지원하며 정치세력과 경제정책을 조율해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전국 시급 1000엔’을 추진할 때 게이단렌과 지속적으로 논의했다. 그 결과, 전국 평균 시급 24엔이 올랐지만 일부 언론과 여론은 “이미 구인난으로 그만큼 시급이 오른 상태라 새로울 것이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아베 신조 일본 현 총리 [사진=게티이미지]




그나마 부패권력에 대항하는 조직으로 검찰청의 특별수사부와 사법부가 있었다. 하지만 반 세기에 걸쳐 정권을 장악한 내각과 의화가 인사권을 쥐고 흔들면서 두 조직은 빠르게 순응적인 관료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산케이 신문의 이시즈카 켄지 기자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붕괴’라는 저서를 통해 “2000년대 초반부터 특수부 출신 검사들의 권력이 비대해졌다는 인식이 법무성 고위 관료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특수부 출신의 베테랑 검사를 고위 인사에서 배제하는 경우가 늘었다”라고 꼬집었다. 일본 검찰특수부는 록히드 마틴 스캔들을 계기로 ‘거악(巨惡)을 잠들게 하지 않는다’와 함께 정의의 사도로 인식됐지만, 내각의 지시에 따라 수사를 벌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8년 오자와 스캔들을 조사하다가 검찰이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을 불기소 처분한 바 있다. 이에 시민으로 구성된 검찰 심사회는 강제 기소 판정을 내리며 검찰의 체면을 깎았다. 사법부도 마찬가지다. 30여 년간 판사로 일하다 교수가 된 세기 히로시도 저서 ‘절망의 재판소’에서 법원이 헌법의 수호자가 아닌 권력의 파수꾼으로 전락했다고 질타했다.

▶중앙 권력에 대치하기 시작한 지방권력= 중앙에서 패배한 일본 시민운동은 지역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키워왔다. 일본 시민들은 각 지역의 주요 현안을 놓고 공론을 조직해 주민투표를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2년 코치 현의 쿠보카와에서 실시된 원자력발전소 설치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비롯, 2002년 제방건설계획에 대한 주민투표 등 지역주민들은 지역정책에 직접적인 의사결정권을 행사함으로써 시민사회를 이끌었다.



[사진=고이케 유리코 도쿄 도지사]




현ㆍ도지사가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항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 덕분이다. 오나가 다케시 오키나와 현지사는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지인 헤노코 연안 매립 승인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패소하자 현민들과 연계해 반대운동을 이끌어냈다. 아베 총리는 여론을 의식해 매립공사를 강제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베 총리는 2020년 도쿄올림픽으로 국가 브랜드를 강화할 계획이었지만, 고이케 유리코 새 도지사는 경비 절감과 도민 납세부담 완화를 위해 2020 도쿄올림픽ㆍ패럴림픽 경기장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자체의 견제는 중앙정부의 지방정책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중앙 내각ㆍ의회의 부정부패를 막지는 못하고 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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