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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는, 왜?]어물쩍 넘어가다 더 큰 화(禍) 초래한 美워터게이트…한국에 묻는 것은?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6~7명보다 60~70명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르나 600~700명이 더 낫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제임스 메디슨 전 대통령은 이 같이 말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엘리트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생명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엘리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 ‘양심적 엘리트’가 평범한 시민들(‘demos’)의 정치권력을 수호하는 사회.


리처드 닉슨 대통령

이것이 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꼽히는 '워터게이트' 사태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한 계기가 될 수 있게 한 힘이자,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워터게이트는 ‘최순실 게이트’에 국정이 마비된 한국에 ‘삼권분립’ 시스템과 양심적 엘리트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의 제왕적 입지를 저지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사건 폭로에서 마무리까지 미국 엘리트들의 역할이 컸다. “닉슨의 재선을 위해 대규모 스파이작전을 펼친 정황이 포착됐다”는 워싱턴포스트(WP)의 보도는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서막을 알렸을 뿐이다.

WP의 보도가 없었다면 닉슨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엘리트들이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진상을 알아내는 데에 동분서주했다. 당시 FBI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가 내부고발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WP의 보도는 없었다. 또 WP의 폭로 이후 미국 의회와 대법원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닉슨 대통령은 사퇴하지 않았다. 특히, WP폭로에 앞서 존 시리카 콜롬비아 지방법원의 수석판사가 워터게이트 괴한들을 집요하게 추궁해 백악관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진상규명은 어려웠을 것이다.

행정부 산하에 있는 검찰조직은 대통령 지시에 불복했다. 닉슨은 자신의 사건을 맡은 특별검사를 해임시키기 위해 법무부 장관과 차관을 압박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은 닉슨의 요구에 거부하며 사임했고, 뒤이어 장관직에 오른 차관도 이를 거부하고 사퇴했다.

의회는 즉각 대통령을 견제하고 나섰다. WP 보도 직후 미 상원은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1여 년에 걸친 청문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워터게이트 괴한사건 발생 1년 1개월 만에 닉슨의 보좌관이었던 알렉산더 버터필드는 청문회에서 닉슨이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하는 녹음장치를 설치했다고 폭로했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행정부의 특권’을 내세워 녹음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이때 대법원이 나서서 ‘대통령의 특권’을 제한했다. ‘미합중국 대 닉슨 대통령’이라는 사상 초유의 법정사건은 대통령의 권한과 특권이 국민의 알 권리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기념비적인 판례를 남겼다.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녹음파일을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하원 법사위원회는 닉슨에 사법권 행사 방해와 대통령 취임선서 위반, 위원회의 소환장 무시를 이유로 탄핵안을 승인했다. 결국 닉슨은 1974년 8월 사임한다. 언론, 검찰, 대법원 등이 합심해 권력을 남용한 대통령을 심판하고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워터게이트 괴한 사건이 백악관의 주도로 이뤄진 증거자료를 워싱턴포스트(WP)에 제공한 마이크 펠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충격에 빠진 여론을 달래기 위해 미국 의회는 일사분란하게 새 법안을 마련하며 다음 수순에 들어갔다. 1971년 연방선거 캠페인법과 세입법을 마련해 후보자들이나 선거운동위원회들에 수령되거나 지출되는 자금을 공개하도록 했다. 또 개인이나 정당 또는 정치활동위원회(Political Action CommitteeㆍPACs)를 포함하는 정치위원회의 기부를 제한했다. 이를 시작으로 회계공개법(Financial Disclosure Act)이 제정돼 대통령을 포함한 백악관 관계자들이 의무적으로 자금 이용내역을 공개하도록 했다. 정부윤리법도 마련돼 공직자가 법률적으로 부여받은 권한을 행사할 때 자신의 재산 상 이익을 위해 자금을 사용하거나 얻을 경우 처벌받게 됐다. 닉슨처럼 공직자가 정부의 돈을 대규모 도청 및 부정부패 사건에 사용하는 일을 방지하려고 마련된 것이었다.

대통령이 자신을 수사하는 특별검사를 임의대로 해임시킬 수 없도록 하는 특별검사 제도도 구축됐다. 이는 ‘특별검사’(special prosecutor)라는 직명을 부여해 집권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실규명과 정의구현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진 법안이었다. 해당 법안은 삼권분립 논란으로 1999년 폐지됐으나, 대신에 검찰청의 내부규정으로 검찰총장이 연방항소법원의 추천을 받아 특별검사를 임명하고 수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가 형성됐다. 


워싱턴포스트 1972년 10월 10일 지면

백악관 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워터게이트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 측근 비리는 미국에서도 만연한 일이었다. 워터게이트 사태로 닉슨이 사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는 측근을 감싸는 대통령들의 행보를 다소 용인해왔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지면서 사회 분위기는 180도 달라지게 됐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절친이자 당시 관리예산처(OMB) 총괄자였던 바트 랜스가 비리 스캔들에 연루되자 그를 적극 옹호했다. 랜스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국민적 분노에 직면하자 “대통령의 명예를 위해” 사임했다. 랜스는 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행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은 국민들은 작은 측근 비리에도 분노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보좌관들도 이란 콘트라 스캔들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임기 때만 해도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왔으나, 카터 전 대통령과 언론, 그리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는 ‘역대 가장 무능했던 대통령’으로 평가받았다.

대통령직은 고독한 자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으로 미국은 대통령이 최측근을 곁에 둘 수 있도록 보좌관 시스템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 권한 역시 국민의 권한보다는 아래에 있었고, 이러한 인식을 가진 미국의 양심적 엘리트들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미국민을 우롱한 닉슨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축출했다.

제왕적 대통령 체계가 강한 한국에서는 시민 저항이 민주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을 국민의 발 아래 두려면 국민의 권한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정치 '엘리트들'이 제도를 마련해줘야 한다. ‘인사권’을 무기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한국 행정부가 시민 저항에 끊임없이 부딪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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