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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28. 모로코 동화 마을에 사는 ‘현실의 소녀’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쉐프샤우엔의 파란 메디나의 골목길, 어느 방향으로 갈지 망설이는데 마침 한 소녀가 걸어온다. 길을 알려주는 소녀는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를 구사한다. 학교에 다녀오는 중이라는 열일곱 소녀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서 함께 메디나를 걷게 되었다. 소녀는 방실거리는 얼굴로 자기 집으로 가자는 제안을 한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나는 흔쾌히 함께 가기로 한다.
소녀를 따라간 곳은 파란 메디나 어느 막다른 골목이다. 작은 문으로 허리를 굽혀 집으로 들어가서 좁고 길쭉한 건물의 계단을 따라 오른다. 2층의 나무문을 여니 거실과 방과 주방이 한 눈에 다 보이는 소박한 집이다. 파란색 페인트칠이 된 단정한 외벽에 비하면 궁색한 살림이지만, 천정에 창이 있는 모로코 가옥의 특징은 그대로다. 실내에서 하늘이 보이는 이 구조가 마음에 든다.

집에 있던 열 살짜리 동생은 외국인 손님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른다.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우연의 일치인지 만화 ‘스머프’가 방영되고 있다. 쉐프샤우엔의 색깔이 파랗다 해서 스머프 마을이라고도 불린다는데, 스머프마을의 텔레비전에 스머프가 나오고 있는 순간에 이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인셉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집에 와서야 자기소개를 마무리한다. 모로코의 학교에서는 공용어인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기본으로 배우는데 인셉은 요즘 영어를 공부하는 중이다. 인셉의 영어는 기초를 벗어나지 못해서 말하는 시간 보다 서로 웃는 시간이 더 많다. 인셉의 집은 구경할 만큼의 살림살이도 아니어서 좁은 거실에 앉아 인셉의 영어 회화 교재와 아랍어로 된 동생의 교과서를 들여다본다.


잠시 후 엄마와 이웃집 아줌마가 들어온다. 낯선 손님에 놀랄 법도 한데, 인사를 하고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민트 티를 끓여와 따라주고는 나를 쳐다본다. 들어보니 인셉은 열일곱인데 엄마 나이는 서른셋이다. 옆집 아줌마도 비슷한 나이 같다. 그렇게 일찍 엄마가 되고 빨리 할머니가 되는 삶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속을 스친다.
아무래도 성인 여자들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바디랭귀지가 풍부해서 뭐든 다 알아듣게 된다. 스페인어가 유창하다는 아빠는 직장에 나갔다며, 엄마와 이웃집 아주머니는 부업인지 기다란 색실을 계속 땋으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한다. 몸짓을 보니 먹고살려면 이런 것이라도 해야 한다며 푸념을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다 바디랭귀지다. 외국인을 데려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뿌듯한 시선이 그 와중에도 느껴진다.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서 그만 가겠다고 일어서니 인셉 모녀가 점심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다. 호의를 함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악한 내 머릿속은 잠시 복잡해진다. 점심을 먹으면 돈이라도 줘야 하는지, 오늘따라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게 없어서 볼펜도 한 자루도 없는데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면 어떡해야 하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홉즈라는 빵에 콩 수프를 찍어 먹는 소박한 점심상이 고민하던 마음을 부끄럽게 한다. 그들은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옆집 아줌마도 아이들도 물론 나도 다 같이 빵을 손으로 잘라서 콩 수프에 찍어 먹는다. 소박한 점심 후에는 모로코에서 흔하디흔한 오렌지를 먹는다. 껍질도 제대로 벗기지 못하는 나를 위해 어린 인셉이 능숙하게 오렌지를 잘라준다. 콩 수프와 빵, 오렌지와 민트 티 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입 안이 향기롭다.


식사를 마치자 인셉은 3층 옥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마을 전경을 보여준다. 건물 아래에서 쳐다보면 청량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파란 건물들이지만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정리가 덜된 옥상과 빨래 더미들과 전깃줄과 안테나가 뒤섞여 있는 건물 뒤로 리프 산맥이 보인다.
내 수첩에 아랍어 주소를 꼼꼼하게 적는 인셉에게서 든든한 큰 언니의 향기가 난다. 활달하다기보다 세심한 성격의 인셉이 처음 보는 여행자를 자기 집에 데리고 올 생각을 했다는 게 기특하기만 하다. 


예기치 않게 점심까지 얻어먹고 한나절이 지나갔다. 진짜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매일 왔으면 좋겠다며 인셉과 동생이 골목 어귀까지 따라와 손을 흔든다. 영리해 보이는 인셉이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머나먼 이국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이방인에게 먼저 손 내밀어 준 인셉을 잊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짠해져서 크게 포옹을 하고 돌아선다.
메디나를 돌아서 내려오는 길, 쉐프샤우엔의 예쁜 풍경들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인셉을 만나지 않았다면 파란 동네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현실과는 동떨어진 동화마을로만 기억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쉐프샤우엔의 어느 골목 너머로 보이는 빨래의 주인들을, 계단 옆의 작은 문 뒤편을 떠올릴 수 있다. 쉐프샤우엔 여행의 정점은 인셉네 집에서 찍었다. 동화 마을에 사는 현실의 소녀 인셉이 보여준 사람 사는 풍경은 쉐프샤우엔의 진짜 추억으로 남았다.

정리=강문규기자 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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