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민상식ㆍ윤현종 기자] 자신이 가진 부(富)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지금까지 전 세계 155명의 억만장자들이 동참했지만, 아직까지 기빙플레지에 동참한 한국인 부호는 없다.

그만큼 한국인 억만장자들이 기부에 인색하다는 뜻이다. 그나마 공익 재단을 만들더라도 상속세를 낮추거나 경영권을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최근 순수과학 연구에 수천억원을 기부한 한국인 부호가 나타났다. 바로 서경배(53)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다.

서 회장은 개인적 차원의 사회공헌활동에 대해 숙고하다 사재 3000억원을 들여, 지난 7월 생명과학 기초 연구를 지원하는 공익법인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했다.

재계 오너가 순수과학 분야 육성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 것은 국내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기 때문에 서경배 회장의 이같은 겸허한 도전에 관심이 쏠렸다.

[슈퍼리치]‘통큰 학술기부’ 나선 두 국내 재벌-copy(o)1

서 회장이 화장품 사업과 무관하게 순수 생명과학 분야에 통큰 기부를 하는 것은 국내 신진 과학자를 장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재단은 매년 공개 모집을 통해 생명과학 분야 신진학자 3∼5명을 선발하고 각 과제당 5년 기준 최대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서 회장은 지난 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재단 출범 기자회견에서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젊은 과학자들이 무한한 꿈을 갖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어릴 적 만화영화 주인공인 ‘아톰’을 보며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워온 서경배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과학의 힘을 몸소 체험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열정이 더욱 커졌다.

1990년대 아모레퍼시픽이 화장품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노화를 방지하는 비타민 유도체 ‘레티놀 아시드’를 화장품에 적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경영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바로 1997년 수백 번 실험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제품 ‘아이오페 레티놀 2500’이었다.

이 제품 기술의 토대는 선친인 고 서성환 선대 회장이 ‘기업의 미래는 과학에 있다’고 판단해 1992년 설립한 ‘태평양중앙연구소’에서 나왔다.

1954년 한국 화장품 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개설했을 정도로 과학기술에 관심이 깊던 서 선대회장은 2003년 작고하기까지 “과학기술의 발전 없이는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강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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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친의 뜻을 이어받은 서 회장은 그동안 꾸준히 과학 연구 지원에 앞장섰다. 2006년부터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와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을 제정했고, 2015년부터는 ‘차세대연구자상’을 신설해 국내 분자생물학 및 세포생물학 분야 연구자에게도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서 회장은 100년 이상 과학 연구가 계속되는 재단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1조원 규모까지 사재를 기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단 운영 기금은 서 회장이 보유한 아모레퍼시픽과 아모레퍼시픽그룹 주식 등을 출연해 마련할 예정이다.

헤럴드경제 슈퍼리치팀이 집계 중인 ‘한국 100대부호 리스트’에 따르면, 서경배 회장은 주식자산 9조원을 넘게 보유한 국내 2위부호다.

서경배 회장이 손에 쥔 아모레퍼시픽 지분 10.72%와 아모레G 지분 55.7%의 주식가치는 지난 7월 1일 기준 10조1476억원이었다. 하지만 ‘사드 사태’로 주가가 곤두박질친 이후 서 회장의 주식가치는 이달 2일 기준 9조3367억원으로 급감했다.

[슈퍼리치]‘통큰 학술기부’ 나선 두 국내 재벌-copy(o)1

▷ 슈퍼리치 ‘한국 100대 부호’ 조창걸 자산 자세히 보기 (PC버전) ▷ 슈퍼리치 ‘한국 100대 부호’ 조창걸 자산 자세히 보기 (모바일 버전)

서 회장 외에도 수천억원에 이르는 사재를 출연, 순수 학문 연구를 위한 공익재단을 설립한 재계 오너가 한 명 더 있다.

국내 가구업체 1위인 한샘의 조창걸(77) 명예회장이다.

조 명예회장은 지난해 3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식 260만주를 출연해, 국가정책 개발을 위한 연구재단 ‘여시재(與時齋)’를 설립했다.

60만주(당시 시가 약 1000억원)의 출연은 완료됐으며, 남은 200만주의 현재 가치는 3000억원에 달한다.

여시재는 ‘시대와 함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한국판 브루킹스연구소’를 표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서유럽 원조정책인 마셜플랜을 내놓은 브루킹스 연구소는 헤리티지 재단과 함께 미국의 양대 싱크탱크로 꼽힌다.

조 회장은 1970년 한샘을 창업한 31세때부터 한국의 미래를 그려내는 ‘한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설립을 꿈꿨다고 한다.

조창걸 회장은 지난해 사재를 출연하면서 “한일합병, 남북 분단, 한국전쟁 등은 우리나라가 미래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고 이를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라며 “앞으로도 한국은 주변의 강대국 사이에서 이들과 함께, 그리고 이들을 조정하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하므로 싱크탱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달 18일 공식 출범한 여시재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이사장을 맡고, 법조계에선 안대희 전 대법관이, 관계에서는 김현종 전 유엔 대사가, 재계에서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등이 참여한다.

1994년 한샘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조 회장은 여시재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재단에서 아무런 직함을 맡지 않았다.

헤럴드경제 슈퍼리치팀이 집계 중인 ‘한국 100대부호 리스트’에 따르면, 조창걸 회장의 주식자산은 7084억원으로 국내 43위 부호에 올라있다.

조 회장은 상장사 한샘 지분 20.16%와 비상장사 한샘이펙스 지분 3.1%, 한샘넥서스 지분 2.6%를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