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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 조금 까다롭고 어려운 ‘당신’
프랑스 유학시절에, 박사과정의 젊은 학생들이 60대의 노교수에게 편하게 ‘너(tu)’라고 호칭해서 신기해했었다. 당시 한국 여학생은 좀 더 공식적인 불어존칭인 ‘당신(vous)’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수업 중에,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어머니를 친근하게 ‘너’라고 부르다가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을 때 거리감을 두기 위해 ‘당신’이라고 부르며 쓴 편지를 보게 되었고, 필자도 존경하는 자상한 스승께 ‘너’라고 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습관 때문인지, 그분 생전에 감히 시도를 하지 못했다.

‘당신’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방한한 한 외국인 교수를 만나고 나서였다. 자국에서 한국어 교수로 재직 중인 그에게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학생 S가 시험지에 교수를 호칭하면서 ‘당신’이라고 적었다며 정확한 뉘앙스를 알고 싶어 했다. 사실 한국어로는 학생이 교수를 ‘당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썩 많지 않다.

우선,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여보’와 ‘당신’일 때, 당신(當身)은 “내 몸과 같은 사람”라는 뜻이다. 부부가 아닌데 2인칭으로 사용할 때는 (존댓말과 반말의 중간인) 하오체가 되거나( “당신을 처음 보는데요.”), 감정이 격할 때는 아예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 된다. S가 시험지에 쓴 ‘당신’을 이 맥락에서 이해하면 교수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음, 과연 그럴까. 한국어 ‘당신’은 3인칭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수나 부모 등 나이 많은 사람에게 쓰는 존칭으로, 예를 들면 ‘교수님의 생전에 당신께서 남기신 글’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상대방에게 직접 사용하기보다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필자의 프랑스 지도교수는 수년 전에 돌아가셨고, 부인이 혼자 살고 있다. 방학 중에 프랑스에 갔을 때, 그 댁에서 며칠 머물면서 생전에 배웠던 문학이론과 추억을 함께 나눈 적이 있다. 하루는, 그녀가 친한 관계이니 격식 없이 ‘너’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20살 이상을 뛰어넘어 친구가 된 듯 했고, 70살이 넘는 어른에게 ‘너’라고 부담 없이 호칭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불어호칭 ‘당신(vous)’을 존칭이라 배웠건만, 나이에 의한 수직적 상하관계가 한국처럼 강하지 않은 프랑스에서는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거리감을 둔 호칭으로 여길 때가 많았다.

그렇다면, S가 사용한 한국어 ‘당신’은 2인칭일까 3인칭일까. 앞뒤 맥락을 보지 않은데다가 교수가 학생에게 3인칭 ‘당신’을 가르쳐 주었는지 알 수 없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S가 유독 시험지에 2인칭 ‘당신’을 사용해서 자신의 점수를 불리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정황상으로 보면, S가 문법을 잘 몰라서 혹은 필자처럼 존경을 담은 표현이라고 여겨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외국인 교수를 다시 만나면, 프랑스의 사모님이 먼저 ‘너’라고 불러달라면서 문화적 거리감을 없애준 경험을 들려줄 생각이다.

뉘앙스를 제대로 알게 되면, S는 과거의 필자처럼 기뻐하며 그 언어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 어느 나라 어느 언어건, ‘당신’은 쉬운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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