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카드뉴스]돌아오지 못한 7000명의 한국인, 우키시마호를 아시나요


[HOOC=서상범 기자ㆍ홍윤정 인턴 디자이너] 일본이 2차 대전 항복 선언을 한 후 일주일이 지난 1945년 8월 22일. 배 한 척이 일본을 떠나 부산을 향합니다.

4700톤의 거대한 이 배의 이름은 우키시마호.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탑승했었습니다. 광복을 찾은 조국을 향해 떠나던 이 배는 그러나, 24일 갑자기 진로를 바꿔 교토 마이즈루 항으로 향합니다.

막 항구를 들어서던 순간, ‘쾅. 쾅’ 거대한 굉음이 잇따르며 배는 순식간에 두동강이 났습니다. 수천명의 한국인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절규하다 차디찬 바다로 가라앉았습니다.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2차 대전 후 동아시아 해역에서 일어난 최악의 해상사고. 바로 우키시마호 사건입니다.

당시 발표된 공식적인 한국인 송환자만 3725명. 이 중 524명만이 공식 사망 인정을 받았습니다. 나머지는 실종처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최대 70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이 배에 탔다고 말합니다.
사고 후 7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먼저 사고 원인에 대해 일본 정부는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부설한 기뢰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배 내부에서 폭발음이 들렸다는 점을 들어, 일본의 계획적인 자폭설을 주장합니다. 최근에는 배 내부에 폭발물이 존재했다는 일본 정부의 기록문서가 공개되며 이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항로 변경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됩니다. 일본 측은 기뢰를 피하기 위해 예정된 항로를 변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뢰가 상대적으로 적은 먼 바다 쪽이 아닌, 일본 연안으로 배를 돌렸다는 것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사건처리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건 발생 9년 뒤인 1954년. 선체가 인양됐지만, 아무런 조사도 없이 선체는 민간기업에 고철로 팔아 넘겨졌습니다.
제대로 된 보상조차 없었습니다. 1992년 일본 정부에 대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10년에 걸친 소송 끝에 패소하고 맙니다. 한국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아직도 생존자와 유족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합동위령제를 매년 지내며,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71년이 지난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tiger@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