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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아버지는 731부대 헌병대장이었다”…日 변호사가 아버지의 전범사실을 알린 이유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일본 고치(高知)신문은 22일 “‘전쟁체험과 기록’ 전하려는 강한 집념”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일본의 가해역사를 알리며 반성을 촉구하는 일본인들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중에서도 변호사 이토 히데코(伊東 秀子ㆍ73)의 행보는 특별하다.

일본 사회당의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현재 홋카이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토 히데코는 부친이 731부대 헌병대장으로서 겪은 일과 죄, 그리고 패전 후 행보를 담은 ‘아버지의 유언’이라는 제목의 책을 지난 6월 발간했다.

자신의 부친이 731부대 헌병대장이었던 사실과 731부대의 잔혹행위를 알리는 책을 발간한 이토 히데코(伊東 秀子) 변호사.

해당 도서는 일본이 자행한 생체실험과 중국ㆍ조선인들의 피해 실태를 다루고 있다. 이토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생체실험 ‘재료’였고 잔인한 형태로 죽었다. 적어도 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름을 빼앗기고 ‘마루타’라 불리며 살해당했다”라고 설명했다.

이토 변호사는 2010년이 돼서야 자신의 부친이 731부대의 헌병대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토는 중국 푸순 시를 방문했다가 부친이 ‘중국인 22명을 731부대로 보냈다’라고 밝히는 중국공산당의 기소장을 발견했다. 확인 결과 이토의 부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전쟁에 투입돼 731부대에서 헌병대장(중령)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의 패전 후 시베리아로 보내져 5년을 지낸 뒤 1950년 중국 푸순 시 전범 관리소에서 6년을 지냈다. 그리고 1956 년 7 월에 특별 군사 법정에서 징역 12 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토의 부친은 1987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딸에게 이 같은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 이토 변호사는 히로시마(廣島)의 유력 현지신문인 주코쿠(中國)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엄마와 오빠만 사실을 알고 있었다”라며 “1978년 방송국 일을 하던 오빠가 아버지랑 중국을 방문해 다큐를 제작한 것을 봤지만, 전모를 알지는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이토 히데코 변호사가 자신의 부친이 특별 군사법정에서 진술한 기록을 토대로 발간한 책인 ‘아버지의 유언’.

이토가 기억하는 자신의 아버지는 생전 “전쟁은 정치가(위정자)에 따라 순식간에, 충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한번 일어나면 아무도멈출 수 없다”라며 전쟁의 잔혹함을 경고한 인물이었다.

그는 평소 부친이 “한 번 광기에 빠지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전했다. “성실한 인간도 전쟁터에서 태연하게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빼앗고 여자를 강간한다”라며 “전쟁이 불리해지면 지휘관도 군인도 점점 미쳐간다. 나도 그랬다”라고 반복했지만 이토는 자신의 아버지가 잔혹한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고 온화한 분이었기 때문에 충격이 심했다”라며 부친의 범죄와 마주했을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731부대를 연상시키는 훈련기에 탑승해 논란을 일으킨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총리.

그가 부친의 죄를 세상에 알리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내각의 행보 때문이다. 이토 변호사는 주코쿠 신문에 아베 내각이 “731부대까지 부정하지 않을까 염려했다”라며 책을 발간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아베내각이 “2년 전에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용인을 각의결정하고 그 이후에 중의원에서는 안전보장법제를 쟁점화했다. 그리고 지난해, 안보법제를 성립했다”라며 “일본의 가해역사를 축소평가하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강제성을 정말 없었는가, 난징대학살의 피해자가 그렇게 적었는가”라고 지적했다.

2010년 아버지가 전범관리소에서 작성한 진술서를 확인한 그녀는 자신의 부친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부친의 죄를 아는 것이 괴로웠다”라며 “하지만 진술서를 읽으면서 사형을 모면하고 싶은 비열한 감정을 누른 아버지의 ‘혼’과 마주할 수 있었다”라고 당시 기분을 설명했다.

이토가 입수한 부친의 진술서에는 판결을 앞두고 중국인 22명이 아닌 44명을 731부대에 보냈다는 밝히는 기록이 나온다. 이토는 “누명사건도 변호해본 내가 봤을 때 판결 전에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피고인은 없다”라며 “그런데도 진술을 한 것은 부하가 관여한 사안의 죄도 짊어지고 사형당할 각오가 됐으니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731부대 간부와 전시 체제를 주창한 일부 관련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전후 사회로 복귀했다. 이토는 “전쟁이니까,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며 전쟁 중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들도 많았다”라며 “이에 대해 아버지는 전범관리소에서 자신의 죄를 마주하고 사망한 피해자와 유가족에 사죄함으로써 파괴된 인간성과 양심을 회복했다. 전쟁은 인간을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것이 전쟁의 실체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 2013년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숫자 ‘731’이 들어간 훈련기에 탑승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네티즌들은 사진이 731부대를 연상시킨다고 반발했다.

731부대의 인체실험과 관련해 중국 유가족들은 도쿄 지방법원 등에 민사소송을 꾸준히 제기해왔지만 도쿄 지방법원은 원고단 측의 청구와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일본의 대법원은 2007년 5월 731부대 중국피해자 유가족의 상고를 기각했다. 일본 외무성은 731부대가 진행한 세균전으로 피해를 본 중국인들의 가족 12명에 대한 비자발급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토 히데코 변호사는 중의원의원이었을 당시 위안부 제도가 민간이 아닌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 겸 육군대신이 총괄한 제도임을 증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1992년 그는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로부터 자료를 입수해 한국인은 물론 중국ㆍ필리핀인도 위안부에 포함됐으며, 일본 정부가 이들을 동원해왔다고 밝혔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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