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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스토리] 텔러에서 행장까지…'뚝심'의 박종복 SC제일은행장
중국 고전 열자(列子) 탕문편에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유명한 고사가 실려있다. 옛날 중국에 우공(愚公)이란 노인이 살았는데 그의 집은 태항산과 왕옥산 사이에 있었다. 험준한 산세 때문에 왕래가 힘들어지자 우공은 두 산을 옮기기로 했다. 아들, 손자들과 함께 흙과 돌을 파내고 지게에 실어 발해 끝에 버리고 오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주변의 비웃음에도 우공은 자손 대대로 계속하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응수했다. 결국 우공의 정성에 감독한 옥황상제가 두 산을 들어 옮겨 없애줬다. 어떤 일이든 끈기를 갖고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다.

영국 SC그룹이 제일은행을 인수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행장에 오른 박종복 행장이 19일로 취임 600일을 맞으며 3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1979년 제일은행에 입행한 정통 ‘제일맨’인 박 행장은 올해 4월 ‘제일’이란 행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하며 SC제일은행의 본격 부활을 알렸다. 그는 향후 10년 안에 SC제일은행을 한국 최고의 국제적 은행으로 만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은행장의 성공 스토리는 비슷하다. 본점 부서를 두루 경험한 뒤 지점장, 임원을 거쳐 최종적으로 행장에 오르는 수순을 밟는다. 글로벌 진출에 박차를 가하는 최근 은행권 분위기를 고려하면 해외 경영전문대학원(MBA)이나 해외 지점 경험도 빠질 수 없는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이 걸어온 길에는 우공처럼 ‘별종’ 같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박 행장은 평생 제일은행에만 몸을 담은 정통파지만, 약간의 지점 경험 후 본점에 들어간 다른 동기, 선후배와 달리 입행 후 20여년을 지점에서만 보냈다. 말단 텔러에서 시작해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하지만 은행 임원이 되는 ‘엘리트 코스’라는 본점 종합기획부, 국제부, 인사부 등 요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대신 기나긴 현장 생활을 통해 어느새 영업에는 잔뼈가 굵어졌다. 행내에서도 손꼽히는 자타공인 ‘영업통’이 됐다. 엘리트 코스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현장에는 누구보다 가까운 우직한 영업 전문가. 이는 지난해 1월 영국 SC그룹이 제일은행 인수 10년 만에 그를 첫 한국인 행장으로 임명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본사가) 처음엔 언어가 통하는 외국인 행장을 뽑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영업 잘하는 사람을 찾게 된 것”이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바닥에서 성장…도전이 키운 영업통= 박 행장은 1979년 제일은행에 입행한 뒤 20여년을 11개 지점을 돌며 현장을 경험했다. 당시는 은행 직원의 90%가 고졸자가 대부분이던 시절이다. 서울 시내 대부분 은행 점포에 근무하는 직원 중 대졸자는 한두명에 그쳤다.

때문에 그의 입사 동기들은 3년 가량 지점에 근무한 뒤 대부분 본점에 들어가 핵심부서들을 돌았다. 하지만 박 행장은 임원이 된 뒤에야 본점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행원 초기에는 일을 계속할 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원래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는데 은행을 그만두고 꿈을 쫓아야 하나 번민했었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은행원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이 들었고 일을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은행원의 길에 ‘올인’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영업일이라면 닥치지 않고 했다. 강남 부촌부터 학원 밀집가, 시장통까지 돌지 않은 곳이 없다. 한국 진출 후 10년 간 시장 안착에 어려움을 겪던 SC그룹이 그를 눈여겨보게 된 일도 이때다.

자산관리(WM) 개념이 아직 생소하던 2004년 PB센터가 처음 도입되자 지점장 자리에 나선 것. “당시 지점장 권유를 몇 군데 지점에서 받았습니다. 지점 생활을 20년 했는데 일반 지점에서는 배울 게 많지 않다고 판단했죠. 은행에서 PB센터를 만든다고 하기에 도전해서 강남 PB센터장이 됐습니다. 리스크는 있지만 남들과 차별화하고 싶었습니다.”

PB센터장이라는 역할을 맡은 박 행장은 기존에 시도되지 않았던 PB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통을 깨는 실험에 돌입했다. 공채 출신 행원 중심의 인사 체계를 깨고 최초로 외부 전문가 채용에 나선 것이다. “그때는 한국 시장 자체에 PB가 없었습니다. 주식, 부동산, 세무 등의 분야를 아우르는 완성된 PB가 일부 외국계 금융기관을 빼면 없었죠. 그래서 직접 뽑아 육성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회계사, 세무사, 증권사 출신을 뽑았고 기존 행원과 다른 연봉 체계도 도입했습니다.”

▶사람냄새 나는 행장…긍정의 힘 믿음도= 박 행장은 ‘사람’을 중시한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영업을 하려면 은행원에게 반드시 인간적인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모바일ㆍ인터넷 중심의 비대면 거래가 금융권의 대세가 되고 있지만, 소매금융의 핵심인 WM 시장에서는 고객들을 직접 만나 비밀스러운 고민까지 상담하고 긁어주는 은행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박 행장은 신입 행원을 뽑을 때도 지원자의 인간적인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ㆍ금융지식은 입행 후 교육으로 해결되지만 은행원의 기본 자질인 올바른 품성과 긍정적ㆍ영업 지향적 마인드는 후천적으로 기르기 어렵다는 지론이다. “70∼80년대 단순한 금융 환경에서는 지식이 많으면 됐지만 극도로 다원화된 지금은 통하지 않습니다. 학교나 전공은 중요하지 않고 인성이 얼마나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를 봅니다.”

평소 그가 성공 키워드로 꼽는 ‘PITCH’에서도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PITCH는 긍정(Positive)과 인간(Human), 국제적 감각(International), 트렌드(Trendy), 창조성(Creative)의 줄임말이다. “사람과 긍정적 마인드가 가장 중요합니다. 은행도 사람 냄새가 나야하고 정서적으로 고객과 통해야 하죠. 고객에게 신뢰를 주는 게 올바른 뱅킹입니다.”

직원과의 격의 없는 소통에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해 취임 100일을 맞아 구입한 승합차는 전국 영업 현장을 도는 데 쓰고 있다. 예고 없이 일선 지점을 방문해 있는 그대로의 현장을 확인하고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사주며 생각을 듣기도 한다. “행장의 권위는 있어야 하지만 권위주의적이어선 안 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수행비서나 형식적 의전, 절차는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낭비입니다. 자연스럽고 꾸며지지 않은 소통이 중요합니다.”

▶미래 은행업은 차별의 경쟁…“외국계 딱지 떼야”= 은행업의 미래에 대한 박 행장의 비전은 확고하다. “앞으로는 규모의 경쟁이 아니고 차별의 경쟁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SC제일은행의 지점 수는 3월 말 기준 256개(출장소 포함)다. 국내 주요은행의 점포가 1000개 안팎임을 고려하면 경쟁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하지만 비대면 거래와 핀테크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많은 지점, 직원이 필요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최근 SC제일은행이 신세계백화점, 이마트에 ‘뱅크샵’, ‘뱅크데스크’ 등 초소형 점포를 속속 출점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둔 포석이다. 그는 적은 지점수에 대해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선제적으로 보면 엄청난 강점”이라면서 “변화는 갑자기 찾아온다. 그때 가서 점포를 줄이는 건 쉽지 않다”고 강조했다.

박 행장은 향후 소매금융 시장이 WM 중심으로 재편되면, SC그룹의 글로벌 역량을 갖춘 SC제일은행이 독보적 우위를 점할 것으로 자신했다. “과거 WM은 일부 자산가 고객에 한정돼 있었지만 100세 시대에는 50대에 은퇴한 소비자들의 노후관리에 관심이 커지면서 모든 은행들이 WM 분야에 집중하게 될 겁니다. WM은 국내외 상품을 조합해 리스크를 분산하는 게 핵심인데 SC제일은행은 이미 본사와 함께 하고 있죠. 국내와 글로벌, 양방향 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은행입니다.”

‘외국계 은행’이라는 색안경과 반복되는 철수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진출 10년 만에 한국인 행장을 임명한 것은 현지화에 성공하려는 의지가 컸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난 10년 간의 외국인 행장 시절 영업 분야에서 놓친 것들을 제대로 돌려놓자는 의미”라면서 “한국인 행장이면 행내 이해당사자들이 다 선후배일텐데 오히려 정리가 어렵지 않겠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강승연 기자/sp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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