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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쌀롱인터뷰] 또 하나의 주연배우, 무대를 말하다
-뮤지컬 ‘페스트’ ‘모차르트’, 오페라 ‘도요새의 강’ 무대감독 정승호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공연예술에서 무대는 대사 없이 연기하는 또 하나의 주연 배우다. 잘 하는 건 드러나지 않지만, 못 하면 몇 배로 ‘욕’을 먹는다. 어떤 때는 무대가 지나치게 현란해서, 또 어떤 때는 지나치게 공백이 많아서 혹평을 면치 못한다. 구조물이 잘못 작동해 사고라도 나는 날에는 관객들의 거센 항의는 물론 다량의 티켓 환불 사태를 감당해야 한다.

정승호(49ㆍ서울예대 교수) 감독은 국내 공연계 손꼽히는 무대 디자이너이자, 다작(多作)을 하면서도 욕을 덜 먹는(?) 축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그 작품에 꼭 맞는, ‘정석’에 가까운 무대 연출 때문이다. 올해 초 뮤지컬 ‘베르테르’에 이어 현재 비슷한 시기 공연되는 ‘페스트’, ‘모차르트’, 그리고 오페라 ‘도요새의 강’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오페라 ‘도요새의 강’ 무대 작업이 한창인 정승호 감독.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특히 서태지 음악을 기반으로 한 화제의 창작 뮤지컬 ‘페스트’는 무대 디자인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중세, 혹은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 유독 많은 한국 뮤지컬계에서 가공의 미래사회, 그것도 창작극의 무대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의 행복마저 시스템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공화국, 아직 가 보지 않은 시대를 그린 무대와 조명, 영상은 미래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극의 ‘참고서’가 될 만 했다. 섬세하면서도 안정적인 무대, 정 감독의 장기가 십분 발휘됐다.

▶미래사회 그린 ‘페스트’…‘젠(Zenㆍ禪)’ 스타일 살린 ‘도요새의 강’=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정 감독은 ‘페스트’의 시대 배경을 관객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 시작 부분에 나오는 ‘2028년 공화국 출범’이라는 자막 때문에 시대 배경을 가까운 미래인 2028년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건 공화국 출범 한참 뒤의 이야기예요. 페스트 대본에도 2096년으로 돼 있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디자인했죠.”

정 감독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스템을 거대한 구조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금속 느낌의 대형 구조물은 전식(電飾ㆍ가느다란 선 조명)을 이용해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벽체를 구획하고, 나뉘어진 사각 프레임에는 화소가 왜곡된 영상을 투사시켜 미래적인 이미지를 구현했다.

“인간보다 거대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만든 게 원형 구조물이에요. 1막 시작에서는 밝은 미래의 분위기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주죠.”

회색빛 미래도시 속에서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무대 장면이 페스트 백신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방이다. 양 옆으로 펼쳐진 책장 한 가운데 초록 정원의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온다. 

뮤지컬 ‘페스트’ 무대. [사진제공=스포트라이트]

“페스트와 싸우는 사람들의 공간은 색채가 있고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표현되길 원했어요. 사실 제가 했던 작품 중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세트를 오마주한 거에요. 저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보고 더 재밌어 하시라고요.”

오페라 ‘도요새의 강’에서는 젠 스타일을 강조했다. 영국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ㆍ1913-1976)이 일본의 전통무대극 ‘노(能)’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작품에 맞게 미니멀하고 모던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강조했다. LED 같은 원색 조명 대신, 할로겐 조명을 많이 썼다.

“도요새의 강은 현대 오페라잖아요. 우리나라 오페라는 푸치니, 베르디 일색인데, 현대 오페라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로운 것에 도움이 되고 싶은거죠. 페스트도 마찬가지고요.”

뮤지컬 ‘페스트’ 무대. [사진제공=스포트라이트]

▶연극판에 남고 싶어 선택한 무대=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출신인 정승호 감독은 연극판에 남고 싶어 무대미술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CF 감독이 되고 싶어 연극영화학과를 지망했지만 “필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경제형편이 어려웠다.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 학교 연극부 ‘잡일’을 도우며 처음으로 연극을 접하게 됐다.

연극이 재미있어 연기자가 돼 볼까 하는 꿈도 꿨다.

“당시 한양대 최형인 교수님 연기 수업을 들었어요. 너무 매력적으로 잘 가르쳐주셨고, 그 덕분에 연기자의 꿈을 꾸게 됐죠.”

그러나 또 다시 좌절했다.

“아르바이트로 영화 단역 출연을 했었는데, 어느 날 저 때문에 필름도 많이 낭비하고 (촬영이 늦어져) 사람들이 집에 못 가는 일이 생긴 거에요. 내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연기를 해야하나 싶어 그날부로 접었죠.”

방황하던 정 감독은 일용직 노동자 일을 전전했다. “망치질 하나는 잘 했다”는 그는 우연히 한 선배로부터 “연극판에도 막노동 비슷한 게 있는데 해 봐라”는 제안을 듣고 연극 무대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는 파주에 있는 논밭 비닐하우스 같은 데서 무대를 만들었어요. 3~4일동안 집에도 못 가고 먹고 자면서 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에요. 내가 이걸 하면 연극판을 안 떠날수 있겠구나 생각한거죠.”

그때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무대 작업을 했다. 거기에서 아내를 만나 함께 유학길에 올랐고, 미국 뉴저지에 있는 럿거스(Rutgers)대학에서 무대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게 됐다. 그의 아내는 이주희 의상 디자이너. 부부는 다양한 작품을 함께 하고 있는 공연예술계 파트너다. 

뮤지컬 ‘페스트’ 무대. [사진제공=스포트라이트]

▶“작은 공연시장 한계…용기를 좀 더 줬으면”=정 감독이 무대 연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토리텔링’이다. 무대미술에서 중요한 건 미술보다 무대 그 자체라는 것.

“장면과 캐릭터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정서, 그걸 잘 반영해주는 무대가 괜찮은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무대 일을 한 것이 20여년. 학교에서도 14년째 무대미술을 가르치고 있는 그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낀다. 무엇보다도 국내 공연시장이 작은 데서 오는 한계다.

“시장이 작다보니 자본이 투입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돼 있어요. 수많은 관객이 들어도 적자가 큰 게 현실이거든요. 그러다보니 무대에 큰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이죠. 무대 사고가 나는 것도, 디자이너의 잘못이라기보다 우리나라 공연계 시스템의 문제인것 같아요. 관객들은 이미 세계적인 프로덕션에서 하는 공연들을 접했고, 눈높이는 높아졌어요. 그런데 한정된 예산을 갖고 그 눈높이에 맞추다보면 퀄리티가 떨어질 수 밖에 없어요. 안전 문제에 소홀해질 수도 있고요. 관객들이 우리 시장을 조금 더 키워주거나, 아니면 이런 시장을 인정해주고 용기를 줬으면 좋겠어요.”

한국 나이로 오십에 접어든 정 감독은 “이제 작품 수를 조금씩 줄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후배들이 무대미술 분야에서 조금 더 국제적인 일들을 많이 해주고, 이 시대에 맞는 걸 선도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페라 전용 극장에 대한 희망도 내비쳤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오페라하기 좋은 극장이에요. 이렇게 아담한데서 하니까 밀도감도 굉장하고, 오페라가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매일밤 다양한 오페라 공연을 볼 수 있도록 전용극장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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