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18세기 혼돈의 조선, 책거리 병풍이 유행한 까닭은…
예술의전당 ‘조선 궁중화·민화걸작’展
정조때 그려진 책거리 병풍 등 58점 전시
르네상스 시대 유럽·중국 거쳐 열풍
조선후기 지적 허영·욕망의 민낯 반영돼…
세련된 색의 향연 감탄 절로



책을 비롯한 각종 기물들을 쌓은 그림을 책거리(冊巨里)라 한다. 그 중 책장에 가지런히 진열돼 있는 그림은 책가도(冊架圖)라 부른다.

18세기 조선 후기는 변혁의 시대였다. 돈만 많으면 양반 호적도 살 수 있을만큼 반상을 구분하는 신분제도는 서서히 힘을 잃고 있었다. 유교를 숭상하면서도 청과 서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때였다.

돈을 주고 양반이 된 중인들 사이에서는 안방에 책거리 병풍을 둘러치거나, 문자도(文字圖ㆍ문자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를 거는 것이 유행이었다. 책거리에 그려져 있는 기물들은 대개 도자기, 문방구, 안경, 화병, 가구, 과일 등 당시 유럽과 청나라에서 들여오던 것들이었는데, 조선의 새 부자 양반들의 지적 허영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욕망이 여덟폭 책거리 병풍에 펼쳐져 있었다. 

호피장막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그런데 이러한 책거리 유행은 실은 궁중에서부터 비롯됐다. 실학을 중시하며 청의 최신 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조선 정조대왕(1776~1800)에 의해서다. 17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서재를 그린 ‘스투디올로(studiolo)’가 유럽에서 청나라로 넘어와 ‘다보격경(多寶格景)’이 됐고, 18세기 조선에서 이를 들여와 책가도와 책거리로 진화했다. 정조는 1791년 어좌 뒤에 왕을 상징하는 ‘일월도’ 대신 책가도를 두고 신하들에게 “경들은 보이는가? 이것은 책이 아니고 그림이다”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 궁중화ㆍ민화걸작’전은 책가도와 책거리, 문자도 58점을 볼 수 있는 전시다.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국공립 박물관, 사립미술관 컬렉션과 함께 개인 소장품들도 나왔다. 장롱 깊숙히 숨겨져 있던 개인컬렉터 소장품이 전시장에 나오게 된 건 현대화랑과 협업의 힘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조 시기에 그려진 초창기 책가도 병풍(삼성미술관리움 소장, 개인 소장)과 책거리 병풍(서울미술관 소장, 개인 소장), 궁중화원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 병풍(국립박물관 소장)과 ‘백수백복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자수책거리’(용인민속촌 소장), ‘제주도문자도’(제주대박물관 소장, 개인 소장) 등 20여점이 최초로 공개됐다. 

문자도, 현대화랑 소장

특히 책거리의 걸작으로 알려진 장한종의 ‘책가도’(경기도박물관 소장), 책만 가득한 ‘책가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호피 장막 속에 책거리가 그려진 ‘호피장막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도 한자리에 공개됐다.

먹으로 그린 전통산수화 같은 것만 우리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에게 책거리에 표현된 세련된 조형언어와 색의 향연은 놀라움을 준다. 특히 전시장에 나온 책거리, 문자도는 현판 등 1~2점을 빼면 전부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들이다. ‘설치미술’라는 현대미술 장르가 이미 이 당시 병풍이라는 매체로 구현되고 있었던 것. 앞에 있는 사람은 작게 그리고 뒤에 있는 책은 크게 그리는 방식으로 원근법 같은 틀에서 벗어나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책거리, 문자도에서 21세기 새로운 미(美)의 양식을 발견하게 된다.

1898년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ㆍ1842- 1893)는 경상도 밀양에서 문자도 병풍을 보고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림은 전체적인 선에서 전통적으로 엄격하게 규정된 일종의 양식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꽃이나 상징적 동물 형상에서는 페르시아와 인도 예술에서 유입되었을 기하학적인 요소도 엿보인다. 요컨데 하나의 작은 병풍이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제반 요소들이 조선인의 국가적 예술 전반에 걸쳐 그 기저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당초 8월 28일까지 예정했으나, 9월 이후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내수용으로 그치기엔 아까운 전시를 9월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시기, 세계 미술계 관계자들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서울 전시가 끝나는대로 뉴욕 스토니부룩대 찰스왕센터, 캔자스대 스펜서박물관, 클리블랜드미술관 등 미국 순회전을 예정하고 있다.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