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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렉시트, 세계에 묻다 ④] ‘어디에나 있는 그들’… 일베ㆍ샤이 토리ㆍ트럼프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얼마전 홍익대의 한 미대생이 만들어 논란을 일으켰던 조각상의 제목이다. 이 작품은 극우보수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일베)’를 상징하는 손가락 모양을 본뜬 것으로, 작품에 항의하는 일부 시민들이 훼손해 논란이 됐다. 작품을 만든 학생은 “사회에 만연하지만 실체가 없는 일베를 보여줌으로써 논란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작품 의도”라고 밝혔다.

작품명에 쓰인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는 문장은 2년 전 일베 논란을 다룬 한 방송 시사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이 프로그램은 일베 등 익명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극우민족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이 넘쳐나지만, 현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문제를 짚었다.

일베를 상징하는 손모양을 본뜬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조각상

▶‘샤이 토리’… 어디 숨어 있다 나왔나 =비슷한 문제가 6월 23일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치른 영국에서도 일어났다. 예상을 깨고 EU탈퇴파가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탈퇴파의 승리 원인은 여러 각도로 분석되지만, 영국 내에서 일베처럼 이민자를 혐오하는 극우민족주의 정서가 퍼지고 있는 것이 그 중 하나로 꼽힌다. 실제 탈퇴파는 나치를 연상시키는 홍보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국민투표 직전까지만 해도 상당수 영국인들은 EU탈퇴파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세 후반 들어 탈퇴파가 기세를 올리기는 했지만, 조 콕스라는 EU잔류파 여성 의원이 “영국이 먼저다(Britain First)”라는 구호를 외친 남성에게 피살되면서 분위기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40여년 동안 EU의 일원으로 지내온 데 따른 사고의 관성도 “설마 탈퇴파가 이기겠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도박꾼들은 탈퇴파 패배에 돈을 걸었고, 투표 마감 직후 발표된 여론조사도 같은 예측을 내놨다. 그 시점 세계는 잔류파 승리에 축배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실제 개표 결과는 52% 대 48%로 탈퇴파의 승리였다. 영국 내 주류 정치인, 국제 기구와 여론 분석 기관, 언론,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뜨리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현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 아웃’하지 않았던 이들이 익명성이 보장되는 투표소 안에서는 본색을 드러낸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샤이 토리’(Shy Tory)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줍은 보수파’라는 뜻으로 숨어 있는 보수표를 말한다. 이들은 일상생활이나 여론조사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 대신 투표장에서 가면을 벗는다. 인기 없는 정당,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있는 정당을 찍는 것을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즘이나 인종주의ㆍ민족주의에 대해 각고의 반성을 해온 유럽인들에게 ‘이민을 규제하자’는 주장을 함부로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나이젤 패라지 영국 독립당 당수가 나치 홍보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브렉시트 홍보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민자 앞에선 좌파도 우파도 없다= 문제는 ‘아무데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극우민족주의 정서가 실제로는 ‘어디에나 있다’고 할 정도로 퍼져가고 있음에도 주류 정치인, 전문가, 언론 등은 이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에서는 “폴란드 해충 꺼져라”라고 적힌 카드가 나왔는데, 기득권층은 그저 인종주의를 우려하는 ‘준엄한 경고’를 반복할 뿐이었다. 이는 샤이 토리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하고, 실제 세력을 또 다시 과소평가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영국 기층 민중 사이에서는 이미 이민 찬반 여부가 정치 성향을 나누는 중대한 이슈가 됐지만, 기성 정당은 이를 외면했다. 영국은 20세기 들어 보수/노동 양당이 자리잡았는데, 이는 소득 분배, 정부 크기, 복지 등 전통의 좌우 논리에 입각한 정치 구도일 뿐, 이민에 대한 입장에 따라 세워진 구도가 아니다. 브렉시트 논란 중 양당이 내부에서부터 분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좌파냐 우파냐가 아니라, 브렉시트냐 브리메인이냐가 쟁점이 되니 양당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었다. 오히려 선명하게 이민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자유민주당(브리메인 진영)과 독립당(브렉시트 진영)이 기성 정당을 위협하는 대안 세력으로 떠올랐다.

대선 정국의 미국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민 문제를 쟁점으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민자가 세운 나라’에서 이민을 규제하자는 이 주장은 뜨악하게 보이지만, 실은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진 극우적 정서를 기민하게 포착하고 이용한 것이다. 눈치가 없었던 공화/민주 양당과 전문가 집단, 기성 언론들은 처음에는 트럼프를 과소평가했지만, 그는 결국 미국판 ‘샤이 토리’들의 힘을 업고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주자에 올랐다. 이제는 도리어 트럼프를 막기 위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찍겠다는 공화당원들도 속출할 정도다.

▶한국판 ‘샤이 토리’도 커져간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극우정당의 움직임은 없다. 다만 ‘일베’의 사례처럼 극우정당의 태동을 전망케하는 정서가 점점 자라나고 있다는 것만은 명확하다. 앞서 언급한 “폴란드 해충 꺼져라”의 소식을 전한 국내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가장 호감도가 높았던 것은 “조선족들도 조국 중국으로 제발 돌아가서 다시는 오지마라”였다. 조선족 등 저임금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논리는 브렉시트 지지자나 트럼프 지지자의 논리와 똑같다. 단순히 “배타적 인종주의는 안돼”라는 도덕적 훈계로 이들의 불만을 짓누르려고만 해서는 어느 순간 괄목상대할 정도로 몸집을 불린 한국판 ‘샤이 토리’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는 이유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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