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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00. 28박29일 800km의 끝…마침내 만난 산티아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29:아르수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39.5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촉촉한 비가 적셔놓은 거리로 나선다. 하루만큼 걸으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게 한편으로는 믿어지지는 않으면서도 막상 마음은 한껏 부풀어 있다. 어제 14km만 걷고 아르수아에 멈춰 쉬면서 오늘은 40km를 걷기로 했다. 편하게 산티아고에 입성하려면 이틀에 나누어 걸어도 될 거리이지만 까미노데산티아고의 의미를 담아 오래 걷고 산티아고에 닿는 것으로 정했다. 걷는데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가는 것도 그냥 내 마음이다.


이 하루를 온전히 걸으면 산티아고는 그 걸음의 끝에서 나를 반길 것이다. 구름 가득 낀 하늘도 이 발걸음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폭풍우가 와도 나는 걸을 것이니까. 결연한 마음 한 구석이 뭉클거리는 게 묘한 기분이 든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해발 300~400m를 오가는 정도라 즐길만한 걸음이다. 스페인의 북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걸어온 발걸음이 산티아고를 목전에 두고 있다. 언덕을 넘어도 비탈길을 걸어도 어떻게 해도 산티아고에 이르게 될 오늘이다.

길가의 나무들은 예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까미노의 노란 화살표가 오늘따라 더 크게 보인다. 세 시간쯤 걷고 보니 표지석의 카운터가 25km로 줄어든다. 남은 거리를 쳐다보는 일이 싱거워지는 대신 오늘 바라보는 풍경들은 모두 소중하게 느껴진다. 노란 화살표는 여전히 한 방향을 가리킨다. 언제나 그랬듯이, 배낭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설탕을 듬뿍 넣은 카페콘레체를 마시는 즐거움도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


마을의 작은 교회, 성소를 지나는 길에서 중세의 순례자들은 감격에 겨워 울며 걸었을까? 죄를 사하러, 영생을 얻으려 걷는 걸음이 아니어도 이렇게 코끝이 찡해 오는데 말이다. 까미노데산티아고는 뇌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여정이다. 19.5km의 이정표를 만나고 나서 거리를 측정해 놓은 숫자는 뇌리에서 사라진다. 언제부턴가 표지석에는 남은 거리도 표기 되어있지 않다. 산티아고의 영역으로 한 번에 들어와 버린 것일까?


구름에 덮였던 하늘에서 점차 구름이 사이 새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지난 며칠간 그렇게 비를 뿌려대던 갈리시아의 하늘이 오늘 산티아고에 입성을 환영하는 듯 맑아오고 있다. 길가에 심어놓은 하얀 칸나 꽃이 활짝 피어나 순례자를 반긴다. 길이 산티아고 공항과 가까워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모습도 코앞에서 보며 걷는다. 널어놓은 빨래만 봐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모든 것에 감동할 채비를 하고 있는 사람 같다.


산티아고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몬테델고소(Monte del Gozo)에 도착한다. 중세의 순례자들이 이곳에 도착해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장소다. 이곳에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82년 산티아고를 방문한 기념 조형물이 있어서 순례자의 발길을 잠시 멈추게 한다. 몬테델고소를 지나면서는 내리막길이다. 산티아고가 눈앞에 보인다고 그곳에 도착한 것은 아니다. 여태 잘 걸어오다가 이곳에서 화살표를 잃어버려 행인에게 물어 다시 까미노를 찾아 걷는다.


29일이라는 긴 걸음이 산티아고에 닿는다. 수천 번도 더 보았을 ‘Camino de Santiago’를 가리키던 파란 표지판은 어느새 사라져 있다. 40km나 걸었는데도 그 어느 때보다 몸은 가볍고 마음은 편안하다. 걷기 초반에는 거리 관념자체가 없었고 남은 거리가 500km가 되었을 즈음에서는 걷는 것이 힘들어 차라리 카운터가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카운터는 25km, 20km, 19km… 그리고 더 이상 볼 수 없다. 0km로 끝나는 표지석을 기대했건만 이대로 산티아고에 입성한다.


산티아고는 갈리시아의 주도인 대도시라서 도시로 진입하는 구간은 대도시의 혼잡함이 그대로다. 넓은 도로와 씽씽 달리는 자동차, 건물들을 지나 걸어야 한다. 성당이 있는 구시가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 시내에 들어와서는 길바닥의 조개껍데기 이정표가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긴 거리를 걸었으니 오후 3시가 훌쩍 넘는다.


보통은 순례자들은 오전에 이곳에 도착해서 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의 12시 미사를 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후까지 걷는 순례자는 별로 없다. 늦은 시각에 산티아고에 진입하는 사람은 아까 걸으면서 만난 몇 명의 순례자들이 전부일 것이다.

몸은 힘들면서도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운이 솟는다. 대도시라서 더욱 지리를 알 수 없으니 일단 대성당 근처로 가기로 한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는 찾아야 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감격보다 대도시의 시내를 더듬어 짐을 풀 알베르게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기막힌 순례길을 한 달간 걸어 감격만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잠자리부터 찾아야 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대로를 걷고 있는데 우리를 마주보며 걸어오는 동양인과 눈이 마주친다. 그는 이틀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는 한국인 순례자다. 거의 2주 만에 한국인을 만난 것이라 반갑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흘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그가 산티아고를 잘 알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구시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던 그는 대성당 근처의 알베르게는 가격이 비싸다며 그가 묵고 있는 근처의 알베르게를 소개해 준다.


더 이상 걸을 필요 없이 그가 알려준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그 한국인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다. 산티아고에서의 첫 끼니는 메뉴델페레그리노가 아니라 그가 추천하는 소고기 구이다.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오늘 40km를 걸은 피로, 낯선 사람과의 낯설지 않은 까미노 이야기가 오후의 레스토랑 안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적당한 타이밍에 미리 알고 기다린 사람처럼 나타나서 많은 것을 단번에 해결해 준 그는 바로 오늘 저녁 산티아고를 출발해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로서도 까미노의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출현한 순례자가 한국인인 케이와 나였던 것이다.


해가 질 무렵 그 고마운 한국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구시가의 산티아고 대성당을 찾아 나선다. 알베르게가 구시가에서 떨어져 있어서 30분쯤 또 걸어야한다. 이미 40km를 걷고서도 다른 교통수단은 알아보지도 않고 또 걷기로 한다. 지난 한 달간의 까미노의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어느 길이든 걸어갈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신시가지를 지나고 구시가지의 중세풍의 거리로 접어들어 드디어 오브라도이로 광장(Plaza de Obradoiro)에 도착한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Ca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이 거기에 서 있다. 해질녘의 대성당 앞에 선 순례자는 얼음이 될 수밖에 없다. 거의 한 달을 오로지 이곳을 향해서 걸었다. 걸어온 모든 길들에게, 만났던 모든 순례자들에게, 800km를 견뎌 준 두 다리에게, 그리고 까미노를 걷겠다고 결정한 그날의 나에게 깊은 감사를 느낀다.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게 한 그 어떤 것에든 무한한 감사가 솟구친다.


산티아고 자체가 유명한 관광지라서 순례자가 아니어도 관광객들은 많다고 하는데도, 해질 무렵의 광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성당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 늦게 도착한 우리는 내일 순례자 완주 증명서인 콤포스텔라를 받고 정오미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산티아고에 해가 진다. 지난 며칠간 계속 비가 내렸는데 오늘 산티아고는 선물처럼 맑은 하늘을 드러내 보이더니, 아름다운 일몰까지 선사한다. 비가 내려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오늘 산티아고의 태양과 해질녘의 하늘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건물마다 불빛이 하나둘 켜진다. 순례자에게는 궁극의 목적지, 경외의 도시이지만 이곳도 사람의 도시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면 막 울음이 터질 거라 상상했었는데 의외로 담담하고 의연하게 나를 돌아보게 된다.


일상에서는 그토록 빨리 지나가버리던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는 경험을 했다. 한 걸음을 내딛어 열 걸음, 스무 걸음이 되고 그 걸음들이 모여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이 읽고 들었어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울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음만큼이나 몸도 단련된 까미노에서의 시간들은 어쩌면 마법 같았다.

해 저문 광장에서 웨딩사진을 찍는 신혼부부의 모습이 지금껏 걸어온 길이 꿈속의 길이 아니었음을 화들짝 깨닫게 한다. 그들의 화사한 웃음이 초췌한 순례자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드디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별들의 들판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오늘로서 여행을 떠나온 지 딱 100일째 밤이다. 일부러 계획한 것도 아닌 데다가 까미노는 35일 정도를 걷게 되리라 예상했는데 일정보다 빨라졌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바로 그날이 한국을 떠난 지 백 일째라는 사실이나 연일 비를 맞으며 걷다가 오늘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석양을 보게 된 것은 모두 우연의 일치겠지만, 까미노가 만들어 준 특별한 이벤트라고 믿고 싶다.

여기서 피니스테레(Finistere)라고 하는 서쪽 땅끝 마을까지는 약 100km의 거리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피니스테레에는 버스를 타고 다녀온다. 하지만 나는 피니스테레까지 3일간 더 걸을 예정이라서 오늘 산티아고 도착을 조금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더 이상 길이 없음을 확인해야만 이 걸음을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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