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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앤스토리] 책임ㆍ인내ㆍ뚝심…정운천, 함거를 깨고 나와 ‘3당 시대’의 중심에 서다
[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 함거(轞車ㆍ죄인을 실어 나르던 수레)는 ‘책임’에 대한 준엄한 상징이었다.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난 자, 타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른 자, 목민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벼슬아치는 대대로 함거행(行)을 피할 수 없었다. 인륜과 나라와 백성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한 죄값, 좁고 거친 나무 창살 안에서 물어야 했다.

함거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이는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야당의 텃밭’이라는 전북 전주을 선거구에서 3번의 도전 끝에 ‘승리’한 전 농림수산식품부장관 정운천(62ㆍ새누리당) 당선자는 달랐다. 그는 스스로 함거에 들어앉았다. 누구 하나 책임지라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는 묵묵히 ‘모든 것이 제 잘못’이라며 고난을 자처했다.

그래서 전북 주민들의 마음은 움직였다. 지난 2011년 그가 LH공사 전주 이전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방선거(전북도지사)에서 낙선까지 한 그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래도 정 당선자는 함거 속에 몸을 구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지사에 당선됐다면 직에서 물러나기라도 했겠지만, 낙선한 나는 어찌할까?” 그는 전북도민에게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30년간을 농사를 지었다. ‘박토’를 ‘옥토’로 만드는 일이었다. 땅을 달래 농작물을 키워내는 일은 인내와 뚝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그는 땅에 의지했고, 한 번을 더 도는 동안은 오로지 민심에 기댔다. 2008년 초대농림수산식품부장관을 거친 후 2010년 전북도지사, 19대 총선에 연거푸 도전했다 낙선했다. 비례대표 제안도 있었고 대학총장으로 오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농사를 짓는 결기로 20대 총선 지역구 에 다시한번 도전했다.

책임과 인내, 뚝심을 넘어 이제 그는 ‘소통’을 말했다. 이제 그가 늘 끌고 다니는 함거의 수레바퀴는 막 정립된 3당 체제를 향해 있다. 정 당선자는 함거에 해묵은 지역주의의 망령과 불통의 정치를 함께 끌고 들어가 정화할 참이다. “함거는 책임정치의 소명을 새기는 나만의 방식”이라며 그는 소탈하게 웃었다. 지난 25일 국회에서 정운천 당선자를 만났다. 

3번의 도전 끝에 지역주의를 깨고 전북 전주을에서 승리한 정운천 새누리당 당선자는 “함거는 책임정치의 소명을 새기는 나만의 방식”이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공고한 지역주의를 깨고 당선됐습니다. 당선 확정 이후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까?

▶가족과 통곡했습니다. 전북에서만 3번째 도전인데 이번에도 안 되면 정치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아들이 술도 잘 먹는 ‘자유맨’인데, 총선 다음날 오후 4시쯤 재검표까지 모두 끝나자 “아부지, 저 교회 갈래요”하더군요. 그만큼 저희 가족에게도 극적인 결과였습니다. 특히 재검표 결과 111표 차이로 당선됐는데, 정말이지 유권자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영원히 유권자들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느낀 지역주의의 장벽은 어땠습니까?

▶저는 지역주의를 ‘포장 속의 귀신’이라고 부릅니다.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30여 년 동안 각종 선거횟수로 치자면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 등 야권 후보만 50여번 당선된 셈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십디다. “투표소에 들어가 1번을 찍으려니 몸이 덜덜 떨리더라, 처음 찍어봤는데 귀신이 잡아갈 것 같아 얼른 도망쳐 나왔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포장 속의 귀신입니다. 다른 마음을 먹고 들어가도 손은 자연스레 2번으로 가는 것, 그것이 호남에서의 지역주의이자, ‘포장 속의 귀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물꼬가 트였으니 이제 지역주의 타파의 ‘선순환’이 일어날까요?

▶한순간에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 두려움과 불신을 녹일 수 있는 온도에 다다라야 합니다. 정치를 농사짓듯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말이 아닐까 해요. 박토, 황무지를 개간하려면 비료도 주고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이번에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당선자 그리고 저 같은 사람들이 지역주의에 균열을 일으켰으니 이제 여기에 가속도를 붙여야 합니다. 석패율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 같은 제도적 보완도 시급합니다.

-지역주의를 그토록 타파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한민국 갈등구조의 뿌리는 지역주의와 이념갈등 두 가지입니다. 국민의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도 이 갈등비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에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혼자라도 주력하려 합니다. 마침 3당 체제도 정립됐으니 그 안에서 갈등을 최소화할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할 차례입니다.

-그동안 ‘야당의 텃밭’에서 고군분투하며 느낀 것들이 20대 국회 3당 체제에 많은 노하우를 제공할 것 같습니다.

▶협치를 하려면 소통을 해야 하고, 소통을 하려면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불신이 깔려있으면 협치가 안 됩니다. “저쪽에서 뭔가를 준다는데 진짜로 줄까? 거짓말 아냐?” 이러면 대화가 되겠습니까. 신뢰가 만들어지려면 먼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차이에 기반해 공감대를 새로 만들어야지요. 3당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끝장 토론’할 수 있는 상시 공간이 하루빨리 만들어져야 합니다. 여야 원내대표나 원내수석부대표가 사안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만났다가 안 만났다가 하는 현재 시스템으로는 안 됩니다.

-직접 여야의 협력을 이끌어낸 경험 중 대표적인 사례를 말해 주신다면?

▶18대 대선에서 당시 야당 후보였던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가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를 전주에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공약이 아니라 법안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직접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 김재원 의원 등과 논의해 법안을 만들고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당시 통합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이제 문제는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내가 앞장서겠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여야 정치권의 의견이 모이자 6개월 만에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죠.

두 번째로는 ‘새만금 특별법’을 통과시킬 당시의 일입니다. 법안 처리까지 주어진 시간이 단 한 달이었습니다.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지요. 당시 남경필 지역화합특별위원장 등과 나서 총 175명의 여야 의원 서명을 받았습니다. 법안 발의 자체에 과반이 넘는 의원이 참가하니 본회의 통과는 일사천리더군요.

-3당의 협치도 중요하지만, 새누리당의 쇄신도 당면한 중요과제입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노력이 중요하지요. 정치적인 이해를 따질 것 없이 국민께 신뢰받는 사람을 외부에서 모셔와야 합니다. 원내대표는 국회의원이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더라도, 당 대표 만큼은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꼭 전당대회를 서둘러 하는 것보다는 외부에서 당 대표를 초빙, 비대위원장을 겸임하게 해서 당의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국민께서 화가 나셨는데 우리를 돌아보시게끔 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 정부의 소통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이에 대해 평가한다면?

▶MB 정부에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도 일을 해봤지만, 이번 정부에서는 ‘불통’이 더욱 강화됐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기자들과 수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국정을 설명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측면이 약합니다다. 국민들이 소통에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과거 일주일 내내 함거에 올라 스스로 반성을 했듯이, (박 대통령도) 소통에 ‘절실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백 번을 책임진다고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무소용입니다. 그러면 알아줄 때까지 호소하는 것이 소통입니다.

yesye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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