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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진이 바꿔놓은 日]기댈 곳은 ‘국가’뿐…극우주의ㆍ수동적 애국주의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힘내라, 일본!(간바레, 닛폰)” 위기의 순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구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는 “힘내라, 고베”가, 동일본 대지진이 일본을 덮쳤을 때는 “힘내라, 일본”이라는 문구가 일본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그리고 14일과 16일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을 강타했을 때도 어김없이 “구마모토 힘내라!”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쉼 없이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 지진은 일본인들의 삶도 바꿔놓고 있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오는 “힘내라, 일본”도 지진의 산물이다. 수동적 애국주의, 그리고 점점 더 우경화되는 일본의 현재 모습 모두 지진이라는 불청객이 안겨다준 일본의 모습이라는 분석도 있다.

▶위기의 순간에 단결하는 일본의 저력과 그 속에서 탄생한 수동적 애국주의=‘자력 갱생’. 힘든 순간, 일본은 견딘다. 2011년 거대한 쓰나미 속에서도 일본 이재민들은 어떤 아우성도 통곡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정부의 대처를 기다렸다.

위기의 순간, 하나의 ‘단결된’ 일본을 구축하지 못한 총리들은 정권교체라는 쓴맛을 봐야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부흥과 재생’을 주요 패러다임으로 내걸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기회를 잡은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총리도 마찬가지다. 아베 총리는 2012년을 ‘부흥원년’으로 선포하고 방사능 유출과 일본 관료주의 실패의 상징으로 전락한 후쿠시마의 이미지 탈환을 시도했다. 재해 지역의 재건을 본보기 삼아 일본의 정신을 널리 알린다는 이른바 ‘재해 공동체’를 구축한 것이다. 후쿠시마 이재민과 정부, 그리고 이웃 지역민들과 이재민 사이 온갖 설전과 갈등이 오갔지만 ‘부흥원년’은 이 모든 것을 ‘위기를 극복하는 일본’이라는 이미지로 덮어씌웠다.

그 속에서 탄생한 것이 ‘수동적인 애국주의’다. 문제는 일정 정도 의식하지만 이에 대해 항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재해의 순간, 기댈 곳은 ‘국가’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재해의 공포를 수 차례 겪으면서 일본인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아닌 ‘정부’라는 주체에 의존하는 성향을 띄게 됐다.

후쿠시마 사태가 발발한 직후, 후쿠시마 이재민을 제외한 다수의 일본인들은 SNS 상에서 “간바레, 닛폰(힘내라, 일본)”이라는 이미지와 문구를 공유했다.

분게이 슌수(일본 문예춘추)는 후쿠시마 발발 3개월 만에 후쿠시마 이재민, 구조대, 그리고 순직자들의 미담만 골라 ‘숭고한 희생’으로 재포장했다. 구호품 부족과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재민들의 절규는 희미한 기억에 불과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추궁하기 위해 10만 명에 달하는 일본 국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지만, ‘탈원전’에서 ‘재원전’으로 돌입하는 아베 내각은 5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경제불안과 재해공포 속 탄생하는 ‘일본 우경화’= 1995년 한신 대지진 발발 당시 일본의 우경화 바람은 다소 미진한 듯 보였다. 일본경제 버블은 1990년부터 꺼지기 시작했지만 1990년 중반까지만 해도 그 충격은 미진했다. 덕분에 눈에 띈 것은 ‘수동적 애국주의’를 중심으로 일본의 자원봉사 정신을 포장하는 일본의 행보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구마모토 지진은 다르다. 당장 SNS상 퍼진 ‘조선인 독극물 유포설’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퍼진 ‘조선인 난동설’을 떠올리게 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아베가 우경화에 박차를 가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극우주의가 일본 사회에 부상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진이라는 재앙이 일본 군국주의의 ‘기폭제’로 작용한 것은 일본의 경기가 어려웠을 때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은 성장 둔화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경기 불안 속에서 조선인 학살이 발생했고,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군축논의가 제기됐다.

2004년 니가타 지진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우경화 행보도 경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 현재 20~30대를 구성하고 있는 청년층은 유년기에는 한신 대지진(1995년)을 겪고, 이후 2~3 차례의 강진을 경험했다. 그 사이 경제는 내내 불황 속에 있었다. 외교적으로는 중국과 한국 사이 고립돼 식민지배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영광이나 번영을 체감한 기억은 없고 고난만 연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이들이 희망을 가진 곳은 ‘국가’밖에 없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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