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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94. 해발 1500m 정상 ‘난코스’…다리는 후들거리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 +23: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에서 오세브레이로까지 27.9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는 중세부터 오세브레이로로 오르는 전초기지다. 중세에는 프랑스 상인들이 살았다는 이곳은 지금도 유서 깊은 성당, 수도회, 박물관까지 갖춘 명소라서 인포메이션을 갖추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인 것이다. 어제 비 내리는 거리를 헤매다가 극적으로 안내소를 발견해서 알베르게를 찾고 케이도 만났으니,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오늘 일정은 완전한 등산이다. 해발 600m쯤 되는 이곳에서 해발 1500m의 칸타브리야산맥을 향해 올라 해발 1300m의 오세브레이로에서 묵을 예정이다. 고도를 700m나 올리면서 28km를 걸어야 해서 까미노의 몇 안 되는 난코스 중 하나라고 한다.



어제의 사연을 남겨두고 발걸음을 옮긴다. 걸음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졌다. 물집이 생겼던 발가락에는 죽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신기하게도 새살이 돋아나는 중이다. 이제 물집 전문가가 다 됐다. 너덜너덜해진 발은, 보기엔 흉해도 더 이상 아프지는 않다. 오른쪽 발목도 많이 나아졌다. 한계를 넘어서고 보니, 컨디션은 정상 이상이다.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새살과 함께 돋아난다. 길은 대체로 도로의 갓길을 따라 가게 되어 있어 발이 편하다. 케이의 발걸음과 나란하게 잘 걷고 있다. 온갖 역경을 거친 내 발은 순례자의 것으로 완성되는 중이다.



까미노를 걸으니 그에 관련한 것들은 무엇이든 눈에 먼저 보인다. 순례자 동상이 눈에 띄어 다가가 본다. 호리병을 들고 막대를 짚은 페레그리노의 조각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지금 걷는 길은 여러 가지 까미노 중에서도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되는 까미노 프랑세스이지만, 이곳에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영토인 론세스바예스로부터 거리를 측정해 놓았다. 내가 걸어온 거리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론세스바예스부터 출발해서 지금까지 559km를 걸었고 앞으로 190km를 더 걸으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레온 지방의 마을들을 거쳐서 산으로 오른다. 메세타의 고위평타면으로 기억되는 까스띠야이레온(Castilla y Leon) 지방의 마지막 마을들이다.

이 지역은 목축이 주요 산업이라 방목되는 소, 목초지를 뛰어다니는 말, 거리에서 순례자를 따라오는 개와 낯선 사람을 무시하고 졸고 있는 고양이까지, 동물들이 많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동물들이 더 반갑다.



길은 편해도 오르막길만 계속된다. 하루에 700m를 오르자니 그만큼 힘이 든다. 이제부터는 등산코스다. 주변은 밤나무로 가득하고 길바닥에는 낙엽과 밤송이가 꽤 많이 쌓여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산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마구 주워갈 것 같지만, 지나가는 사람도 몇 명 없으니 토실한 밤은 그저 거름이 되거나 야생동물의 먹이가 될 것이다. 자연의 일은 자연이 알아서 하고 순례자는 묵묵히 오를 뿐이다.

산기슭의 마을마다 알베르게나 바가 순례자를 유혹하지만 이제 우리는 점심은 먹지 않고 걷게 되었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초콜릿이나 과일 정도로 요기를 하며 걸은 다음 저녁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만족이다. 포만감이 없는 게 걷기에 더 편한 걸 보면 이제는 진짜 순례자가 다 되어 가고 있나 보다. 세브레이로(Cebreiro)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열심히 오르다 보니 익살맞은 어느 순례자가 돌과 풀로 만들어 놓은 사람의 얼굴이 미소를 짓게 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이지는 않지만 여유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좋다.



어제 산아래에서는 비가 내렸지만 고지대 산간인 이곳엔 눈이 쌓였다. 새하얀 눈이 삼월하순의 봄바람에도 채 녹지 못한다. 바닥이 미끌거리기는 하지만 흰 눈을 가까이 보며 걸으니 기분은 상쾌해진다. 인적 드문 길을 편한 마음으로 걷고 있는 게 꿈만 같다. 몸에 지방이 빠지고 근육이 생기는 것처럼 마음도 담백해지고 건강해지는 걸 느낀다. 걷기 시작한 지 4주차에 접어드니, 정신도 육체도 걷기에 최적화되는 중이다.



낮이 되어 기온이 오르면서 산길이 진흙탕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험한 길에 눈이 녹아 미끌거리는데 굳이 이 길을 자전거를 타거나 끌고 지나가는 순례자도 있다. 지나가는 그들에게 부엔까미노를 외쳐주며 나도 신발이 젖거나 말거나 불평 없이 걷는다. 배낭은 가볍고 스틱도 있고 신발은 젖어도 내일이면 마를 것이다. 젖은 운동화가 마른다는 걸 알기까지, 물집이 터져 새살이 돋아나는 걸 보게 되기까지 나는 참 많이 조바심을 냈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한계를 넘어서고 나면, 고비라고 느낀 그것이 정말 별 것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산을 오를수록 눈 덮인 칸타브리야 산맥의 장관은 점점 더 광활하게 펼쳐진다. 가까운 고랭지의 밭에 쌓인 눈이 녹아 하얀 붓질을 한 그림 같은데다 멀리 보이는 산맥이 시야를 시원하게 해서 두 개의 풍경이 합성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멋지다는 상투적인 말이나 사진의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대한 산맥의 눈 쌓인 능선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돌린다. 가파른 길을 오르는 몸이 힘든 만큼 정신은 각성되고 있다. 경험이 그렇게 몸으로 마음으로 녹아들고 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이상하게도 오르기 힘들면 힘들수록 이 시조가 절로 떠오른다. 인생에서 높다고 겁먹고 오르지 않은 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한국에서는 가까운 거리도 차에 냉큼 오르는 빈약한 두 다리가 1500m 정상을 오르느라 후들거린다.

이정표 위에 돌 하나씩을 올려놓고 지나갔을 순례자들을 생각한다. 다들 무언가를 버리고 던지고 혹은 기원하면서 걷는다.

​드디어 갈리시아(Galicia)의 경계임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갈리시아에 왔다는 것은 산티아고에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까미노의 종착지, 순례자들이 그토록 가기를 원하는 곳 산티아고가 갈리시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표 위의 알록달록한 낙서들은 그 기쁨의 표현이다.



굽이굽이 갈리시아의 산길을 오른다. 거의 다 왔다. 보고 걷던 풍경들이 발 아래에 있다고 느낄 즈음 오세브레이로(O Cebreiro)에 도착한다. 산길을 헤치고 눈 녹은 진흙길을 올라왔는데 막상 오르고 보니 오세브레이로는 대단히 말끔한 유명 관광지다. 쾌적한 공립알베르게에 배낭을 내리고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턴다. 꽤 오래 기다리자 나타난 오스피탈레로는 공무원인 듯 무척이나 사무적으로 숙소비를 받고 크리덴시알에 멋없는 도장을 찍어준다.

신축건물인 현대적인 시설의 도미토리에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오르느라 피곤해진 몸을 씻고 나서 다들 침대에 누워 있는 분위기다. 샤워실에 가니 더 가관이다. 6개 정도의 샤워기가 있는 쾌적한 여자 샤워실에 칸막이만 있고 문이 달려있지 않다. 먼저 와서 샤워를 하던 금발의 순례자가 등을 보이고 샤워를 하면서 여기 샤워실 이상하다고 투덜거린다. 한국의 대중목욕탕도 아니고 까미노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좀 뜨악하지만 오늘은 순례자가 많지 않으니 그걸로 다행이라 여기며 재빨리 샤워를 마친다. 별 경험을 다한다.



진흙투성이 옷을 빨고 몸을 씻고 나니 이제야 기운이 난다. 뭔가 군것질이라도 하려고 밖으로 나가 본다. 이곳은 시에스타도 없다. 작은 띠엔다에도 사람이 몇 명 있고 자동차를 타고 올라온 많은 관광객들이 기념품을 사고 성당에 들락거린다. 산 정상의 마을답지 않게 등산용품, 까미노 기념품이 넘치는 것을 보면 꽤나 유명한 곳인 게 확실하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단위로 와서 눈썰매나 보드를 들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도 있다. 해발 1300m 마을이 시골장이라도 열린 것 같이 분주하다.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했으니 순례길에 또 하나의 정점을 찍었다. 이제껏 걸어온 레온과 여기부터 시작되는 갈리시아의 산들이 내려다보인다. 적어도 남은 까미노에서는 이런 가파른 산을 오를 일은 남지 않았다. 모든 길을 다 걸어본 느낌이지만 세상에는 아직 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 또한 까미노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이 마을의 상징 산타마리아 성당에 들어가 본다. 9세기에 지어져 까미노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가장 높은 곳에 있기도 한 성당이다. 소박한 성당과 작은 의자들, 낮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이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성당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두고 간 작은 촛불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누군가를 위해 밝혀 놓은 촛불이 그렇게 아름답고 따듯해 보일 수 없다.

오세브레이로는 세계적인 작가 파울료코엘료가 까미노데산티아고를 걷고 나서 발표한 “순례자”라는 작품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소다. 자신의 검을 찾아 어쩔 수 없는 순례를 시작한 주인공이 결국 이곳 오세브레이로에서 자신의 검을 찾게 되지만, 검보다 더 중요한 검의 비밀을 이곳에서 깨닫으며 순례를 끝낸다. 코엘료가 까미노를 걷고 나서 처음 발표한 작품이 “순례자”이고 그 이듬해 “연금술사”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으니, 그는 까미노에서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은 사람이다.



갈리시아의 알베르게는 주방은 있지만 화기가 없고 식기도 갖추지 않은 곳이 많다. 저녁 정도는 요리해서 먹고 다니는 순례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하다. 배가 고파 찾아간 띠엔따에는 간단히라도 요리해 먹을 만한 것 하나도 팔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순례자 메뉴를 사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간다. 순례자들이 앉은 두어 개의 테이블 말고 다른 테이블에는 사람도 없다. 주문을 하자 하우스 와인과 거친 빵이 먼저 서빙된다. 농도 높은 하우스 와인을 시작으로 우거짓국과 비슷한 갈리시안 수프, 감자 오믈렛과 문어요리까지 그릇을 싹싹 비운다. 배를 채우고 나서는 걸쭉한 하우스 와인이 주는 알코올기운이 살짝 오르는 걸 느끼며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오늘은 케이와 계속 함께 걸었지만 그것은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았다는 말일뿐이다. 이곳을 향해 오른 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발걸음이고 의지이니 이렇게 저녁이 되면 서로의 하루에 대해 할 이야기도 많다.



식당을 나가려는데 마침 식당과 연결된 바에서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기가 중계되고 있다. 프리메라리가의 인기는 이 산골짜기에서도 열광적이다. 마침 명문구단들의 빅매치에 바가 들썩들썩하다. 1:0으로 바르셀로나가 이기던 경기를 금방 레알마드리드가 2:1로 역전을 한다. 바가 떠나갈 것 같다. 경기도 재미있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더 재미있다. 열렬히 박수 치는 사람, 믿기 어렵다는 듯 실망하는 사람들의 몸짓이 과해서 저러다 싸움이라도 날까 조마조마할 지경이다. 경기는 무척 흥미진진했다. 메시가 해트트릭을 기록해 4:3으로 바르셀로나가 재역전했으니 후반전에 이분들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아쉬운 마음에 마을을 한바퀴 돈다. 어느 빛 한 줄기 없는 암흑을 배경으로 한 산타마리아 성당은 반 고흐의 명작처럼 감동적이다.

캄캄한 알베르게 안은 다들 자는 분위기다. 조용히 침낭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 보지만 왠지 잠이 쉽게 잠이 들지 못한다. 이어폰을 찾아 끼고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라파바의 기도를 되새겨 본다. 밤새 음악은 멈출 줄을 모르고, 반은 잠자고 반은 깨어서 오세브레이로에서의 밤을 보낸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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