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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93. 32km를 걷고 나서 길을 잃었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22:몰리나세까에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까지 31.9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몰리나세까의 알베르게를 나와 다음 마을 폰페라다(Ponferrada)를 향해 걷는다. 케이를 까미노의 오솔길로 보내고 힘들어하는 하루까와 함께 도로로 걷기로 한다. 발이 많이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부자연스럽다는 핑계로 하루까와의 마지막 발걸음을 함께한다.

레온을 지나고부터 며칠째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숙소가 없는 것을 하루까는 견디기 힘들어했다. 오늘 케이와 나는 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까지 32km 정도를 걸을 예정이고 하루까는 8km만 걷고 도착하는 번화한 폰페라다에서 머물면서 일본으로 연락도 하고 하루를 쉬고 싶어 한다. 아스또르가 가던 날 힘들다며 다시는 30km는 걷지 않겠다고 되뇌던 하루까인지라, 우리가 오늘 32km를 걷는다고 하니 겁도 먹은 것 같다. 발이 아파서 느리게 걷는 내 발걸음조차 그녀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늘 웃는 얼굴이지만 어제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해도 마음속까지 다 보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보는 많이 모아 온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걷는 경험은 전무할 그녀는 까미노에 들어온지 4일 만에 걷기에 지쳐버린 것이다.

겨우 2시간 걷고서 폰페라다에 도착한다. 시내로 함께 들어가 하루까가 묵으려는 알베르게를 찾아주고 헤어진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알베르게는 아직 문도 안 열었다. 어디서 커피라도 마시며 기다린다는 하루까와 작별인사를 한다. 처음 만나 함께 걸음을 시작하다가 헤어진 레온의 거리에서처럼 서로를 안고 등을 두드려 주며 “부엔까미노”를 빌어준다. 처음의 이별과는 다르게, 3박 4일을 함께 걷다가 헤어지는 지금의 작별인사에는 눈물이 맺힌다. 워낙 활달한 성격이라 걱정은 안되지만 지난 며칠 동안 상큼 발랄한 기운을 쏟아주며 발 아픈 나와 발걸음을 맞추던 하루까라서 더욱 그리울 것이다.



하루까와 헤어져 혼자 걷는다. 제법 큰 도시인 폰페라다에서 빠져나오다 까미노의 화살표를 놓쳐 잠시 길을 잃기도 하지만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은 아일랜드 처녀와 프랑스 할아버지를 만나 다시 길을 찾는다. 프랑스 할아버지는 2달 동안이나 걷는 중이라고 하시면서 대뜸 왜 까미노에 왔느냐고 물으신다. 내가 되물으니 두 달 그는 단지 걷는 게 좋을 뿐이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호기심 많은 아일랜드 처녀는 폰페라다를 돌아보고 가겠다고 까미노를 벗어나 시내로 사라지고, 나는 프랑스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걷는다. 발은 정말 많이 나아졌다. 걷는 속도로 빨라졌고 며칠간 하루까와 함께 걷다가 다시 혼자가 된 기분도 나쁘지 않다. 어제 산을 넘어와서 길도 평탄하다.

잘 정돈된 도시의 현대적인 연립주택 사이를 빠져나간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자동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 차가 지나가지 않고 내 앞에 선다. 머뭇거리고 있자니, 지나가던 남자가 건너라는 눈짓을 한다. 여기는 한국도, 인도도, 남미도 아닌 스페인, 무조건 보행자 우선인 나라다. 도로를 건널 때마다 빠짐없이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왠지 대접받는 느낌이 들고 스페인 사람들에게 호감이 생긴다. 서둘지 않는 이곳에선 너무나 당연한 보행자 우선, 이런 게 사람 사는 여유구나 싶다.



뒤따라가던 프랑스 할아버지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시내를 다 빠져나오고 나서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전통적인 까미노길로 들어선다. 역시 흙길이 좋다. 산티아고로의 이정표 역시 잊지 않고 계속된다.

3월 초부터 북동부 산간에서 서쪽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오는 중이라 쓸쓸한 초원만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포도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인지 가끔 트랙터가 지나가기도 하고 일하러 나온 사람들도 간간이 볼 수 있다. 그대로의 자연도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출현하는 풍경도 정겹다. 바람이 불어 이리저리 구름이 몰려다니며 비를 뿌리다 말다 한다.



까미노 처음에 만난 순례자들과는 길이 엇갈리는지 다시 만나지 못하고 레온을 지나면서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오늘도 처음 보는 순례자 두어 명을 만나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넓은 포도밭을 바라보니 여름이면 포도를 따먹으며 걷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스페인의 포도 재배 면적은 세계 최고, 와인 생산량은 세계 3위라고 하더니만 까미노 길은 가는 곳마다 포도밭이다. 그래서 그런지 까미노를 걷는 동안은 와인 맛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식사를 할 때마다 와인이나 맥주 한 잔 쯤은 기본이 된다.

이 넓은 포도밭을 바라보니 여름이면 포도를 따서 먹으며 걷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스페인의 포도 재배 면적은 세계 최고, 와인 생산량은 세계 3위라고 하더니만 까미노 길은 가는 곳마다 포도밭이다. 그래서 그런지 까미노를 걷는 동안은 와인 맛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식사를 할 때마다 와인이나 맥주 한 잔 쯤은 기본이 된다.



문어를 먹을 수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다는 카카벨로스(Cacabelos) 마을에서 케이와 만나기로 하고 출발했었다. 고비를 넘긴 발은 걷기에 완전히 적응이 되어 오늘은 다른 날보다 빠른 발걸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마을 어귀의 벤치에서 쉬면서 혹시나 하고 케이를 기다리다 일어선다.

마을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흔적도 없다. 인포메이션이 있는 동네라 지도 한 장을 받아 들고 혹시 동양인 순례자가 들렀는지 묻는다. 오늘 동양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마을 출구 쪽에 성당 알베르게가 있다. 여기 앉아있으면 케이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지도를 보니 아침에 케이가 갔던 까미노 길이 하루까와 내가 걷던 도로보다 멀리 돌아서 가는 길이라 혹시 나보다 늦게 이 마을에 도착할 가능성도 있다. 빗방울 뿌리던 아침과는 달리 하늘을 맑게 개여 있다. 순례자 몇 명이 햇빛을 즐기는 중이냐며 웃고 지나간다. 어제는 비가 흩뿌렸으니 그런 오해(?)를 할 만도 하다. 그렇게 따사로운 햇볕을 쬐며 기다리지만 케이는 오지 않는다. 오늘은 나도 빨리 걸을 편인데 아직 만날 수 없다면, 역시 발 빠른 케이는 이미 지나간 것이 틀림없다.

남은 길을 걸어야하기에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없다. 충분히 쉬어서 발걸음은 가벼울 테니 일단 출발해 마을을 빠져나가 언덕으로 오른다. 다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우회하는 까미노가 나온다. 고민 없이 까미노의 화살표가 안내하는 길로 들어선다.



반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나무가 이 선택을 반긴다. 하루까는 나의 까미노에서 멀어졌고 케이는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렸지만, 발은 많이 회복된 것과 더불어 명확한 사실 하나는 내가 지금 여기를 걷고 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을 즐긴다. 



먼저 지나간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고 혼자 걷는다. 포도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서넛이 있어서 길을 묻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돌풍이 몰아치면서 빗방울이 흩뿌리기 시작한다. 난감한 얼굴로 배낭을 뒤져 우비를 꺼내는 나를 바라보던 농부가 다가와 우비 입는 걸 도와주더니 걱정 말고 가라는 듯 등을 툭툭 두드려준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그라시이스’만 외쳐대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가벼워진 배낭에는 걷기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들어있다. 온종일 걷고 알베르게 들어가서 쉬는 단순한 일상이다. 이런 생활이 3주쯤 지속되니 소소한 것에도 감사가 밀려오고 만남과 헤어짐에도 담담해진다. 몸도 마음도 담백해지는 느낌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산 너머로 사라지면 파란 하늘이 보이다가, 구름이 몰려들면 빗방울이 떨어진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무사히 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에 도착한다. 시내로 들어가기도 전, 케이가 기다리고 있을 시립알베르게가 바로 보인다. 이제 다 왔구나 싶어서 알베르게 문으로 들어가는데, 순례자 한 명이 문 앞 벤치에 앉아있다. 문은 잠겨 있고, 스페인어로 닫혔다고 적어놓은 종이 한 장이 성의 없게 붙어 있을 뿐이다. 그 순례자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나는 스페인어가 안 된다. 아는 스페인 단어와 바디랭귀지로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그의 이름은 오스카, 그도 이 알베르게 문이 닫힌 것을 모르고 왔다가 망연자실해 앉아있는 것이다. 그는 스페인어 가득한 스마트폰 앱을 보여주며 시내의 다른 알베르게에 가보자고 제안한다.

하는 수 없이 오스카를 따라서 사립알베르게로 간다. 사람은 없는데 문은 열려있고 테이블에 덩그러니 전화번호가 있어서 오스카가 전화를 건다. 주인이 오는 중이라며 먼저 짐을 풀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이 층으로 올라가 방을 찾는다. 그러나 이곳은 규모는 굉장히 크지만 아직 순례자를 받을 준비는 전혀 되지 않은 알베르게다. 주방은 공사 중이고 방에는 있는 침대들은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먼지가 뽀얗게 널브러져 있다.



비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자꾸만 심난해진다. 영업 중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큰 건물의 엉성한 도미토리에서 초면의 스페인 남자와 단 둘이 머무르는 상상만으로 기가 차다. 항상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던 케이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은 불안감을 더한다. 오스카에게 친구를 찾아보고 오겠다고 말하고 일단 배낭을 메고 우비를 다시 쓰고 알베르게에서 나온다.

시에스타 시간인 데다가 비가 내려서 거리엔 사람이 없다. 단 한 사람이 광장에서 노점을 정리하고 있어 물어보지만 그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낯선 마을에서 동행을 잃고 잘 곳도 찾지 못한 채 처량하게 비 맞고 있는 멘탈붕괴의 순간, 마을 인포메이션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재빨리 뛰어 들어가 문을 연 알베르게가 있는지 묻는다. 이곳이 까미노에서 유명한 관광지라서 인포메이션이 있던 것이다. 직원은 아까 오스카와 갔던 알베르게는 알려 주지 않고 다른 알베르게 두 곳을 지도에 표시해 준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되니 속이 시원하다. 얼른 내 가이드북을 꺼내 내가 가고 싶은 다른 사설 알베르게 이름을 보여주니 바로 그녀가 방금 보여준 두 곳 중 한 곳에 동그라미를 쳐주며 가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준다.



알베르게를 못 찾아 헤매는 사이에 한 시간 반쯤이 훌쩍 지나가고 비는 잦아들고 있다. 지도를 들고 머리를 눕힐 곳을 찾아가는 마음이 편해진다. 늘 그렇듯, 거의 다 찾아와서는 맴맴 돌고 있는데 마침 개를 데리고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얼른 알베르게의 위치를 묻는데 웬일인지 낯선 여자가 반색을 한다. “오! 내가 그 알베르게의 오스피탈레로예요! 도대체 오늘 얼마나 걸어온 거예요?” 지칠 대로 지친 나를 바라보며 오스피탈레로가 묻는다. 긴 하루를 외국어로 설명하기조차 싫다. 32km를 걷고 나서 길을 잃었다고만 대답하고 나를 처량히 바라보는 그녀를 따라 근처에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선다.

케이를 찾는 것은 체념하고 등록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야말로 극적으로 케이와 상봉한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오늘 처음 두 갈래 길에서 케이와 내가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을 시작으로 다른 날과는 달리 예상보다 내 걸음이 계속 빨랐다. 케이는 모든 마을에 나보다 늦게 도착했고, 도착지인 이 마을에서는 만나기로 약속한 시립알베르게가 문을 닫은 게 화근이었다. 내가 비를 맞으며 오스카와 알베르게를 찾아다닐 무렵 아무도 만나지 않았던 케이가 먼저 이 알베르게를 찾은 것이었다.



비가 그친 하늘에 먹구름이 사라지듯 불안하던 마음이 안정을 되찾는다.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먹지 않고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하고 시내로 나선다. 알베르게 바로 앞에 뿌에르따델페르돈(Puerta del Perdon)이라는 문이 있다. 병들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순례를 지속하지 못하는 순례자가 이 문을 통과하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착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교황의 칙령으로 인정했다는 문이다. 근처의 유적을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고는 케이의 가이드가 되어 시내로 내려간다. 비 내리던 오후에 알베르게를 찾아 해메던 길이라 아주 익숙하기 때문이다.

메르까도를 찾아 먹을 거리를 사고 오랜만에 식당에 들러 순례자 메뉴로 저녁식사를 하며 어긋날 뻔했던 각자의 하루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는 발걸음을 맞추어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자기 속도로 걸어서 혼자만의 시간도 충분히 가지며 균형 있게 함께 걷고 있는 케이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출근하는 사람들처럼 매일 열심히 걷게 된다는 케이의 말에 한바탕 웃음을 쏟는다.

어디선가 냉기가 스멀거리는 방에는 유난히 삐걱대는 침대뿐이지만 과분한 잠자리로 느껴진다. 걸음에 지친 낯선 얼굴들이 서로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오늘 같은 날을 상상해보지 못해서 더욱 당황스럽던 하루였다. 아마 다른 엔딩이었어도 해피엔딩으로 우길 것이지만, 다행히 해피엔딩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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