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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스토리] ‘안주’는 없었다…여성가족부 장관 ‘강은희의 삶’
[헤럴드경제=박세환ㆍ박혜림 기자] “겉보기엔 다 다른 듯 보이지만, 일로 따져보면 연결이 돼 있어요. ㈔IT여성기업인협회의 협회장을 하면서 사회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고, 협회를 통해 정책 제안도 굉장히 많이 했어요. IT 전체 생태계를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죠.”

교사에서 사업가로,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정치인에서 다시 행정가로…. 강은희(52ㆍ여) 여성가족부 장관의 도전적인 변신은 ‘우리 스스로가 지금 만들고 있는 전환점들이 과거와 미래의 전환점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고(故) 스티브 잡스의 지난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문을 떠오르게 한다. 교사부터 행정가까지, 일견 접점이 크지 않은 전환점들은 실상 하나의 선으로 또렷하게 연결돼 있다. 

새로운 것에 머뭇거림이 없는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물리학자를 꿈꾸던 어린 소녀에서 아이들과 함께 했던 교사,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기업가, 내가 아닌 우리를 생각했던 정치가, 워킹맘을 위한 행정가로 계속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강 장관에게서 인간미가 물씬 베어나온다. 박현구 기자/ phko@herldcorp.com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여가부 내 작은 북카페에서 만난 강은희 장관은 그가 걸어온 발자취처럼 ‘안주(安住)’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여성 리더였다.

어린 시절에 대해 들려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강 장관은 “학창시절 학생기록부를 보면 ‘도전 정신과 창의성이 강했다’는 얘기가 써 있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님들이 학생들 적성을 가장 잘 보는 것 같은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도전 정신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열망 등이 강 장관을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채찍질한 셈이다.

▶새로운 것에 관심 많았던 소녀 ‘강은희’=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는 강 장관이 어린 시절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우리에게 ‘퀴리부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여성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마리 퀴리’였다. 초등학교 땐 비커, 스포이트 등 과학 실험도구를 구입해 집에서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들을 전부 따라해볼 정도였다. 장래희망도 자연스레 ‘라듐’을 발견한 퀴리와 같은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창시절 현실적인 성격이었다”는 강 장관은 고교 3학년에 접어들며 물리학자의 꿈을 접었다. 그는 “명석하고 뛰어난 재원인 퀴리부인처럼 되려면 장시간 공부를 해야 했지만, 중ㆍ고교 때 몸이 무척 약해 공부를 오래 할 수 없었다”며 “이런 체력으로 내가 과연 물리학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고 했다.

대신 그는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새로운 꿈을 키웠다. 사범대 진학이 본인 성격과 잘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한 것도 선택의 주효한 근거였다.

1983년도에 경북대 ‘물리교육과’ 진학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점을 찍었지만, 예정된 교사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강 장관은 “선친이 대학 3학년 때 돌아가셨고 네 명의 동생을 돌봐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땐 의무발령제가 시행 중이었다”며 “졸업한 선배들이 발령을 받기까지 5~6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했다.

그래서 배운 것이 ‘피부 미용’이었다. “그 시기 우리 나라가 기초 피부미용에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이걸로 잠시 돈을 벌자’는 생각에 피부미용을 배웠어요. 생소한 분야였지만 일도 재밌고 수입도 좋았습니다.”

이후 한 고등학교에 강사 자리가 나서 천직으로 생각했던 교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교사에서 사업가, 또 다른 도전=1987년 원화여고 강사 생활을 시작으로 봉화 소천중ㆍ고교 교사, 동명중 교사직을 차례로 거치며 교단에 몸을 담았던 강 장관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 건 1993년도 무렵이었다.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남편이 시동생과 함께 1988년도에 컴퓨터 교육부터 하드웨어 개발까지 하는 ‘토털 솔루션’ 회사를 설립했어요. 그러다 시동생이 분사를 하면서 1992년께 남편이 저에게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죠. 그게 사업을 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야심차게 뛰어든 첫 사업은 그러나 1년여 만에 완전히 실패해 부도가 났다. 둘째가 태어나고 100일이 될 무렵이었다. 시장에 대한 가능성만 보고 무모하게 일을 벌였던 게 화근이었다.

강 장관은 “(아이가 어린데도) 오래 쉬지도 못하고 부도난 걸 정리하자마자 경북대에 들어가 3년을 보냈다”며 “당시 컴퓨터 교육 붐이 일며 경북대 전산교육센터 설립 등을 추진했는데 그 때 교육원을 만들고 비컴퓨터 전공자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다”고 했다.

비록 사업 실패로 쓰디쓴 경험을 맛봐야 했지만, 이 시간은 오히려 강 장관에게 더 큰 도약을 위한 일보 후퇴의 시간이었다. 다시 교육자 신분으로 돌아가 대학생들과 어울리며 사업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가 전산교육센터와 동아리활동 지원 등을 통해 가르쳤던 대학생들도 이후 새로운 회사가 문을 열자 그를 따라 회사로 들어왔다.

재기의 토대를 마련한 강 장관이 주목한 것은 소방서의 낙후된 전화 교환 시스템이이었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당시 소방서에 전화가 한꺼번에 수백통씩 몰리자 아예 마비가 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각 소방서에선 이런 문제를 어떻게 개선하느냐가 큰 고민이었다. 대구 소방서에서 이에 대한 의뢰를 받은 강 장관은 새로운 전화 교환ㆍ분산 기술 도입에서 해법을 찾았다.

“화재 발생 시 5분 안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만들어줘야 화재 확산을 막을 수 있는데, 전화를 교환하고 분산하는 기술을 제어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창업을 처음할 때 갖췄던 기술을 다 버리고 여기에 특화된 기술을 프로그램부터 하드웨어 보드까지 직접 개발했습니다.”

대구 소방서의 성공적인 시스템 안착을 계기로 강 장관이 도입한 전화 교환ㆍ분산 기술은 전국을 넘어 해외로까지 확산돼 사업은 순탄대로를 달렸다.

▶사업가에서 다시 정치인으로…“나 아닌 우리 위해 많은 고민”=1997년부터 15년가량 ‘기업인 강은희’로 살아왔던 강 장관이 정치와 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2008년. 대구시당에서 디지털위원장직을 제안받으면서였다.

“디지털 컨설팅을 해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해 위원장을 맡아 보니 정치적인 액션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전 정치적인 건 잘 모르니 그저 디지털위원장으로서 당시 한나라당에 디지털 마인드와 기술을 제공해줬습니다.” 뉴스가 보도되면 가장 빨리 중앙당으로 보내주는 시스템 구축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정치권에 미련은 없었다. “보통 위원장직을 수행하면 정치권에 자연스레 진입한다”던 강 장관은 그러나 분과위원장 1년의 임기가 끝나자 추천자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에 당을 나왔다.

그랬던 강 장관이 다시 정치권과 연을 닿은 것이 2012년의 일이었다.

“당시 소프트웨어진흥법을 일부 개정할 일이 있었는데, 제가 일을 해보니 소프트웨어가 건설과 비슷하더라고요. 하도급, 하도급 하다보니 엔지니어들의 능력이나 아이디어, 하도급 업체의 수익이 보장이 안됐어요. 이렇게 가다간 소프트웨어 분야 기업 생태계가 망가지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IT여성기업인협회장을 역임하던 강 장관은 소프트웨어 생태 복원을 위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시스템통합(SI) 기업의 공공정보화 시장 전면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SW산업진흥법 개정’ 작업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입법 청원을 했다.

“대기업 집단은 자사 전산 시스템 수주도 본인들이 다 해결하지 않나요. 안에서만 돌고 있는 걸 우리에게도 공정하게 열어달라는 취지였습니다.” 시장을 열든, 공공사업 제한을 하든 둘 중의 하나는 해결해야 기회의 공정이 이뤄진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 일이 인연이 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군에 올랐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우리 회사 뿐 아니라 전체 IT 생태계를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기업인이 국회에 간 것만 보면 결이 맞지 않는 듯 보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실은 다 연결돼 있었던 것 같아요.”

▶정치인에서 행정가로…워킹맘 문제 해결이 숙원사업=평생을 두 아이의 엄마이자 ‘워킹맘’으로 산 강 장관이 여가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재임시절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 국회 아동ㆍ여성대상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 위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여성ㆍ청소년 안전대책소위원장 등을 지냈다.

강 장관은 “스스로 여가부에 잘 맞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와서 정책들을 살펴보니 한 번씩 손을 대본 것들이었다”며 “돌이켜보면 위원회 일도 대변인을 빼곤 다 했다”고 웃었다.

더욱이 국정과제인 일ㆍ가정 양립도 워킹맘으로서 평생의 숙제처럼 떠안아 온 문제였다. 일ㆍ가정 양립에 자신이 없던 ‘워킹맘’ 강 장관이 일과 가정,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아이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제가 두 아들을 챙긴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날 챙겼어요. 아이들이 자립심이 강해 절 많이 편하게 해줬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워킹맘의 고충을 잘 아는 강 장관은 “공공기관과 대기업 등 일ㆍ가정 양립 실현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지만, 그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조직부터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공공기관, 대기업에서 먼저 일가정 양립이 안착하면 중견기업, 중소기업까지 차례로 확산될 수 있으리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재임기간, 육아휴직 제도를 공공기관과 대기업, 나아가 중견ㆍ중소기업까지 정착시키겠다는 각오다. 특히 남성 육아휴직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강 장관은 “여성이 출산을 하더라도 육아휴직자가 여성이 될 것인지 남성이 될 것인지 모르면 기업에서 여성 고용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지 않겠느냐”며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낳은 뒤 휴직을 하고 복귀하는 걸 보편화하자는 게 우리 부의 목표”라고 했다.

“경제성장을 위해선 결국 여성이 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회제도와 시스템이 뒷받침돼야 하며, 개개인도 일ㆍ가정 양립에 대한 인식을 갖고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일과 가정 양립 문제에 관해선 톤이 카랑카랑하다.

rim@heraldcorp.com

▶강은희 장관 프로필

▷1964년 대구출생

▷경북대 물리교육과ㆍ계명대 컴퓨터공학 석사

▷1987~1992년 봉화 소천중·고교, 동명중 교사

▷1997∼2012년 위니텍 대표이사

▷2009~2012년 (사)IT여성기업인협회 회장

▷2012~2016년 제19대 국회의원

▷2012~2016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아동ㆍ여성대상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 원내 대표인, 운영위원회 위원 역임

▷2016년~ 여성가족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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