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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코흐ㆍBMWㆍ로레알ㆍVW…'親나치'로 공분 산 부호들
[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천예선 기자ㆍ한지연 인턴기자] 미국을 대표하는 석유ㆍ자원 재벌인 코흐 형제는 대선 시즌마다 주목 받는다. 알아주는 공화당 지지자 답게 그들이 누구를 지지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느냐가 공화당 후보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때문이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도 코흐 형제는 “트럼프만 아니면 된다”라는 의견을 명확하게 밝혀왔다. 하지만 그들의 지원이 필요없는 갑부 트럼프가 예상을 깨고 승승장구하면서, 코흐 형제는 모아놓은 정치자금 4억 달러를 처리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졌다. 

그런데 최근 코흐 형제에게 골치 아픈 일이 또 생겼다. 그들이 소유한 에너지 기업 ‘코흐 인더스트리(Koch Industry)’의 창업자인 부친 프레드 코흐(Fred Koch)의 나치 관련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되면서다. 

프레드 코흐(상단 왼쪽), 데이비드 코흐(하단 왼쪽)와 찰스 코흐 형제

코흐 가가 나치를 도왔던 과거는 제인 메이어(Jane Mayer)의 신작 “다크 머니”(Dark Money)를 통해 밝혀졌다. 다크 머니는 과거 부자들이 돈을 써 바뀐 역사들 중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을 다룬 책이다. 코흐 가족은 네덜란드 계 미국 이민자 가정으로, 과거 프레드 코흐가 나치 군대를 위한 거대 오일 정제 공장 짓는 것을 도왔던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프레드 코흐는 나치 시절 히틀러의 열성팬이었으며, 그가 지었던 오일 정제 공장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직접적 명령이었던 것도 더욱 공분을 사고 있다. 

비틀과 페르디난트 포르셰

코흐 가 뿐만이 아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성장한 기업들 중 나치와 관련된 곳들이 많다. 독일 자동차 회사 폭스바겐과 BMW가 대표적이다. 폭스바겐은 나치 정권의 자동차 대중화 정책으로 1937년 설립됐다.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가 히틀러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킨 중산층이 1년을 저축해 살 수 있는 대중적인 차 ‘비틀’(BEETLE)을 만들었다. 포르셰 박사는 자동차 외에도 나치 정권 하 탱크들을 만드는 데에 적극 협조했다. 전후 폭스바겐은 전문 자동차 기업으로 승승장구 해 세계 자동차 업계 2위로 성장했다.

귄터 크반트

BMW의 경우 나치를 도왔던 사실이 밝혀진 후 적극적으로 사과한 기업이다. BMW의 창립자 귄터 크반트(Günther Quandt)는 나치 당원이었다. BMW는 1930~40년대 전쟁으로 인해 항공기 엔진 수요가 증가하자 강제수용소 재소자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했다. 전쟁 군수품을 독점해 성장할 수 있었다. 

BMW의 경영진들은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2007년 자체적으로 나치 협력 행위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하며 반성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BMW 군수 공장에서는 5만 여명이 강제 노역을 했으며 한달 평균 80여명이 사망했다. 경영진은 “깊은 후회를 한다”며 사과했고, 강제 노동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도 세웠다. 1999년 강제 노역자 보상을 위해 독일 정부와 기업들이 세운 ‘기억, 책임, 미래’ 재단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창립 100주년이던 지난 7일에 홈페이지를 통해 또 한번 사과했다. 

외젠 슈엘러

로레알 그룹(L‘Oreal Group) 또한 나치 협조 혐의로 휘청했었다. 화학자 외젠 슈엘러(Eugene Schueller)가 1907년 모발 염색제를 개발하면서 시작된 로레알은 프랑스 친 나치 파시스트 그룹 ‘라 카굴’(La Cagoule)과 인연이 깊다. 

라 카굴은 반유대, 반 공의 파시스트 집단이다. 슈엘러는 라 카굴에 대한 재정적 지원 뿐 아니라, 로레알 본사에서 미팅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또 전후에는 함께 라 카굴에서 활동했던 나치 인사들을 로레알 대표이사들로 앉히기도 했다. 

릴리안 베탕크루와 앙드레 베탕크루

아버지인 슈엘러로부터 막대한 부를 상속받은 로레알의 유일한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Liliane Bettencour)의 남편 앙드레 베탕쿠르(André Bettencourt0 또한 라 카굴 당원이었다. 그러나 로레알 기업의 막강한 힘 덕분에 슈엘러와 앙드레 모두 엄벌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국민들의 원성은 자자했다. 로레알을 살리기 위해 릴리안 베탕쿠르가 선택한 방법은 정면돌파였다. 그는 아버지와 남편의 나치 협조 혐의를 인정하고 사과를 포함한 각종 사회사업을 벌였다. 1987년 ‘베탕쿠르 슈엘러 재단’을 설립해 프랑스와 개발 도상국들을 위한 문화, 자선사업을 펼쳤다. 매년 유럽 최고의 바이오 의학 연구자에게 주는 ’릴리안 베탕쿠르 생명과학상‘도 이 재단이 지원한다.

사실 릴리안 베탕쿠르는 ‘조용한 오너’로 유명하다. 로레알 그룹이 동물 실험 등으로 인해 구설에 올랐을 때도 아무 해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범그룹이란 오명은 그런 그를 앞에 나서게 할 만큼 기업의 존폐를 위협했다. 묵과하는 것보다 사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베탕쿠르의 노력 덕분에 로레알은 친(親)나치 이미지를 지우고 세계 화장품 시장의 15%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화장품 회사가 될 수 있었다.

vivid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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