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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원이 만만하니①] “월화수목금금금 쉴틈이 없다” 대법관 1인당 年 3000건 처리
독일 대법관 128명, 한국 12명이 고작…휴일없이 하루 8~9건꼴 처리

前 대법관들 “업무과중ㆍ신뢰하락” 한 목소리, 판결문에 민망한 오류도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여전히 과중한 업무부담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지만 앞으로 더 나은 환경이 마련되기를 기대합니다”(2012년 7월 박일환 전 대법관 퇴임사)

6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 박일환 전 대법관은 최근 대법원이 직면한 사건 적체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박 전 대법관은 퇴임사를 통해 후임법관들을 위해서라도 업무환경이 보다 개선되기를 당부했다.

4년이 흐른 지금 대법원의 ‘피로’는 여전하다.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났다. 처음으로 3만건을 넘어섰던 2009년 이후 상고사건 수는 매년 3만5000건을 웃돌고 있다.


[사진=헤럴드경제DB]

지난 2014년 한해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만 총 3만7652건에 달한다. 형사 공판사건이 2만773건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민사 본안사건이 1만3016건으로 뒤를 이었다. 여기에 행정사건(2954건)과 가사사건(566건)까지 모두 국내 최고법원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실제 사건을 처리하는 대법관이 12명(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제외)이란 점을 고려하면 대법원의 꽉 막힌 업무과중 현실은 더욱 뚜렷해진다.

2014년 한해 대법관 1명이 처리한 사건 수는 3183건이다. 주5일 근무를 기준으로 하루에 12.2건을 처리한 셈이다. 휴일 없이 일해도 하루 8.7건을 처리해야 가능한 숫자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올해 1월 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대법원]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는 한 판사는 “대법관들은 자택은 물론 주말에도 출근해 업무를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을 지낸 김영란 전 대법관(2004~2010년 재임)도 지난해 펴낸 자신의 저서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재임 중 느낀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김 전 대법관은 “대법관은 임명된 날 하루만 즐겁고 남은 임기 내내 더없이 괴롭다고들 한다. 6년 재임기간 동안 끝없이 사건기록을 읽고, 동료 대법관들, 연구관들과 토론하고 판결문을 작성하는 일들을 물리도록 한다”고 밝혔다.

아직 정확한 집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해 대법원 상고사건 수는 사상 처음으로 4만건을 넘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대법관을 지낸 민일영 전 대법관도 퇴임사에서 이같은 현실에 부담감을 토로한 바 있다. 민 전 대법관은 “대법관 12인이 처리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사건이다. 가히 살인적이다. 대법관들과 재판연구관들이 아무리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도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건 적체가 심할수록 사법부 신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과중한 여건 속에서 대법관들이 중요 사건을 충실하게 심리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민 전 대법관은 “사법 신뢰를 말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며 현재의 시스템이 가진 문제를 지적했다. 김 전 대법관도 “로스쿨 강의 준비를 위해 (재임 중 참여한) 전원합의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니 판결할 당시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대과’가 여기저기서 보였고, ‘소과’는 일일이 말하기 민망할 지경이었다”며 책에서 후일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같은 대법관들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근 대법원은 하급심의 역량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올 초 시무식에서 “심급제도가 그저 같은 사건의 재판을 되풀이하는 절차로 잘못 운용돼선 안 된다”며 “1심 재판관은 최종심 법관의 마음으로 최선의 결론을 내릴 것”을 주문했다.

고영한 법원행정처장도 “3심까지 가는 지금의 현실은 인적 낭비와 비효율을 초래한다”며 현 사법시스템이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인구 대비 부족한 대법관 숫자를 늘려 1인당 사건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인구 8000만명의 독일은 일반대법원에만 128명의 대법관을 두고 있다. 대법관 1인당 인구수가 62만5000명인 셈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대법관 1인당 인구수가 357만명에 달한다.

인구 822만명의 오스트리아도 대법관은 58명, 헌법재판관은 14명이다. 체코는 인구 1062만명에 대법관 64명, 헌법재판관 15명을 두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 역시 대법관을 지금보다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변협은 “12명의 대법관을 추가로 증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며 “26명만 되더라도 1인당 사건수가 현재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충실한 상고심 재판을 받을 기회가 보장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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