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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죄의 재구성] 19년 만에 받아낸 ‘유죄’ 이태원 살인사건
[헤럴드경제=배두헌 기자] 1997년 4월 3일 오후 9시50분. 스물두살 대학생 조중필씨는 여자친구와 함께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 왔다가 소변을 보러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자신에게 벌어질 끔찍한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채였다.

같은 시각. 미국인 10대 두 명은 조씨를 보고 화장실에 따라 들어갔다. 아더 존 패터슨과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당시 18세)였다. 에드워드가 패터슨에게 “누구든지 아무나 찔러봐라”고 충동한 뒤였다. 


접이식 칼을 손에 쥔 패터슨은 조씨의 오른 뒷목을 찔렀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조씨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돌아서 막으려던 조씨는 가슴팍과 왼쪽 목을 8차례 더 찔렸다. 조씨는 화장실 벽에 그대로 쓰러졌다. 에드워드는 범행 직후 화장실을 빠져나와매장 4층에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돌아가 태연하게 범행을 과시했다. “우리가 방금 재미로 누군가의 목과 가슴을 찔렀어.”

패터슨과 에드워드는 이내 피 묻은 옷을 갈아 입고 현장에서 도주했다. 아무런 잘못도 이유도 없이 칼에 찔린 조씨는 과다출혈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범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붙잡혔다. 사건 발생 23일 만에 서울중앙지검은 에드워드를 살인범으로 지목하고 그를 살인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패터슨은 증거인멸죄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사실 애초 진범으로 지목된 것은 에드워드가 아니라 패터슨이었다. 사건을 초동수사한 미군 범죄수사대(CID)가 패터슨을 진범으로 지목했지만 한국 검찰은 ‘조씨에게 반항흔이 없는 만큼 그를 제압할 정도로 덩치가 큰 사람이 범인’이라며 180㎝ㆍ105㎏의 거구였던 에드워드를 진범으로 판단했다.

1998년 1월. 1심에 이어 서울고등법원이 에드워드의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렇게 종결되는 듯 보이던 사건은 1999년 9월 대법원이 앞선 판결을 뒤집으며 충격을 줬다.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에드워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에드워드가 조씨를 죽였다’고 주장한 패터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죽은 사람은 있으나 죽인 사람은 없는’ 이상한 사건이 됐다.



헛발질을 한 검찰은 뒤늦게 당시 공범이던 패터슨을 재수사하려 했다. 하지만 패터슨은 이미 짧은 복역 기간 후 석방돼 미국으로 도주한 뒤였다. 당시 검찰이 실수로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은 틈이었다. 영구미제로 남을 뻔했던 이 사건은 10년이 지난 2009년 10월 한국-미국 법무부 공조로 패터슨의 소재가 확인되며 다행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패터슨은 20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체포됐고 같은해 12월 한국 검찰은 살인 혐의로 패터슨을 기소했다. 인신보호청원을 제기하는 등 송환을 피하려던 패터슨은 결국 지난해 9월 양손이 묶인 채 국내로 송환됐다.

한국에 돌아와 넉 달 동안 이어진 재판 동안 패터슨은 19년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닌 에드워드가 조씨를 찔렀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법원은 패터슨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 심규홍)는 29일 “패터슨이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걸 목격했다는 공범 에드워드 리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며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패터슨은 생면부지의 조씨를 별다른 이유없이 살해했고, 범행수법과 범행결과 등 죄질이 매우 나쁘다. 패터슨은 이 사건으로 22세 젊은 나이인 조씨의 인간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잃게 만들었고 희로애락 느낄 기회를 전면 박탈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조씨의 사망으로 부모는 아들을, 누나들은 남동생을 잃었고 조씨의 존재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모두 사라졌다. 사랑하는 부모와 누나들, 여자친구를 남겨두고 영문도 모른채 떠난 피해자의 원통함을 이루 말할 수 없고, 조씨 가족들의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19년이 지난 지금도 오롯이 남아있다”며 중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유죄로 판단한다”는 판사의 말이 재판정에 흐르자 약 2시간 동안 재판부의 선고를 묵묵히 듣던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씨의 손이바르르 떨렸다.

badhone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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