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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이 만난 골프人]김영 "내 골프인생은 100점 만점에 98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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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골퍼로서의 인생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김영. (사진=원동민 기자)


김영(36)이 골프를 시작한 건 1990년 춘천의 봉의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동기가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원래부터 키가 커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빵, 우유 등 먹을 것을 많이 준다’는 꼬임에 농구를 했다. 처음엔 재미있었으나, 1년 정도 지나니 훈련 강도가 세지면서 점점 힘이 들었고 무릎도 아파왔다. 애초 식탐 때문에 시작한 농구이니 흥미가 있을 리 만무. 하지만 정작 운동을 그만두자 살이 급속도로 찌기 시작했다.

결국 부친(김정찬)이 뚱뚱한 딸을 골프 연습장에 데려간 것이 골프채를 잡은 계기가 됐다. 마침 집은 라데나CC에서 가까웠는데 남춘천여중 시절 박용민 춘천CC(현재 라데나) 대표가 지역의 주니어 골퍼를 육성하겠다면서 골프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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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맨 왼쪽)은 남춘천여중 3학년때 중고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했다.


강원체고를 다닐 때는 함께 골프를 한 조경희가 먼저 국가대표 상비군이 됐다. 그제서야 ‘이러다가 아무 것도 안되는 게 아닌가?’라는 자각이 들었다. 골프를 그만둘까 생각하다가 독하게 마음먹고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필리핀으로 전지훈련을 가서는 새벽 별 보고 나왔다가 밤하늘 별을 보고 들어가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랬더니 고2 때 나가는 시합마다 우승했고, 고3이 되어서는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그 해 4월 일본에서 열린 주니어대회 중 최고 권위의 전국중고학생 골프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8년 대학(경희대 골프매니지먼트학과)에 가면서 투어 프로가 되었고, 2년차이던 1999년 내셔널타이틀인 제13회 한국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안니카 소렌스탐, 낸시 로페즈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하면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연 1억2,000만원에 신세계와 후원 계약을 맺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골프 스타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200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2부 투어에 뛰어들어 1승을 거뒀고, 2002년 퀄리파잉스쿨에서 공동 4위에 올라 꿈에 그리던 LPGA 투어 풀시드권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어떤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 한가. 외부의 기대가 클수록 안으로는 바장거림이 있는 법이다. 호수 수면 위의 백조는 우아하지만, 수면 아래 백조의 발놀림은 쉴 틈이 없는 것처럼.

잘 모르는 이들은 ‘좋은 스폰서 후원받으며 잘 지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KLPGA에서 5승, 미국과 일본에서 1승씩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로로서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소진해야만 가능한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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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후원사 대회였던 25회 신세계KLPGA선수권 우승이 가장 감격적이고 기쁜 기억이다.


- 2003년9월말 후원사인 25회 신세계배KLPGA선수권에서 우승할 때도 스토리가 있었나?
내가 거둔 우승 중에 가장 기뻤다. 드라마처럼 연장전에서 우승했다. 마지막 날 이명희 신세계 회장님과 구학서 부회장님이 시상식 참석차 대회장에 오셨다. 챔피언조로 18번 홀 중간쯤 왔는데 이 회장님이 갑자기 자리를 피하셨다. 나중에 들으니 ‘본인이 그 자리에 앉아 계시면 내가 부담스러울까봐 일부러 자리를 피하셨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한 세컨드 샷이 그린 너머 회장님이 앉아 계시던 의자 쪽으로 굴러갔다. 핀은 그린 뒤편에 꽂혀 있고, 내리막 턱이 홀 앞이라서 볼을 붙여 세우기도 힘들어 보였다. 낮게 보내면 다시 굴러내려올 상황이라 거기서 과감하게 플롭샷을 했다. 미국 대회에서는 거의 성공 못했던 샷이 순간 기막히게 들어갔다. 볼은 홀 1m에 붙었다. 닭살이 돋았다. 거기서 파세이브를 해 이은혜와 동타(9언더파 207타)로 마무리했고, 연장전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던 옆 라인의 5m 짜리 버디 퍼트를 넣고 우승했다. 감격스럽고 너무나 기뻤다. 골프의 신께서 도운 것 같았다.

- 7년간 신세계와 계약이 끝난 다음 해인 2007년(5월28일) LPGA코닝클래식 우승은 어땠는가? 폴라 크리머와 엎치락뒤치락 접전을 벌이다가 14번 홀에서야 선두로 나가면서 3타차 우승했는데?
코닝클래식은 가장 많이 울었던 대회다. 이전 후원사에 대한 미안함과 속상함, 감격이 겹쳤다. 다른 선수들은 깜짝 우승도 잘하던데 나는 준우승을 19번이나 했다. 미국 생활도 힘들었고, 당시에는 스폰서도 없었다. 미국 진출 5년 만의 첫 우승에 기쁨과 서러움이 북받쳤다. 대회 중간에는 ‘이번에도 우승이 아닌가보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후원사 로고도 없는 밋밋한 벙거지 모자를 쓰고 우승했다. 대회 기간에 알레르기 때문에 코가 헐 지경이었다. 대회 내내 코를 한 100번은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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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코닝클래식 우승 당시 미국 언론에 실린 기사.


- 그리고 나서 새로운 후원사 스킨푸드와 계약된 것인가?
코닝클래식에서 우승한 뒤에 연락받았다. 스킨푸드 조윤호 대표님이 ‘TV에서 모자에 아무 로고도 없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는 후원하고 싶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화장품 회사인 스킨푸드 역시 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셔서 편하게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미국에선 아예 그 브랜드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스킨푸드 행사로 골프를 한 건 계약기간중 다 합쳐서 2번에 불과했다. 2009년초에는 미국에 금융 위기가 와서 시합이 23개로 대폭 줄었다. 미국 내에서 하는 시합보다 아시안스윙이 대회가 활발해졌다. 달러 가치도 떨어져서 가을쯤엔 일본 투어로 가려고 생각했다. 그해 말 일본 퀄리파잉스쿨에 도전해 1등으로 통과했다. 2010년에 일본 투어에 진출할 때 후원사인 스킨푸드도 피어리스 브랜드로 일본 시장을 개척하려 할 때였다. 운이 잘 맞았다.

- 2013년7월8일 33세에 일본 도야마에서 열린 니치이코(日醫工) 레이디스 우승으로 한, 미, 일 3개 투어에서 우승한 여섯번째 선수가 됐다. 그건 박세리와 박인비도 아직 못 이뤘다. 당시 우승은 어떻게 기억하나? 마지막날 3라운드에서 버디 4개와 보기 1개로 우승했는데?
정말 악착같이 버텨서 이긴 대회였다. 비가 많이 오고 악천후로 중간에 3번이나 중단된 대회였다. 시합이 2번째 중단됐을 때는 이제 우승컵이 오겠다 싶었는데 아니었다. 마지막 조인 나는 2시 반에 티오프해서 6시쯤 경기가 끝났다. 경기시간만 9시간 10분이 넘어 JLPGA역사상 가장 오래 진행된 시합이라고 들었다. 비가 와서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컸다. 정신력으로 버텼다. 당시 전미정과 같은 조였다. 내가 2등을 할 때마다 전미정이 항상 우승을 했었다. 이번에는 꼭 한번 이기고 싶었는데 드디어 우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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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이코 레이디스에서 우승했을 때의 스코어 보드.


- ‘김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벙거지 모자는 살이 탈까봐, 혹은 누구와 눈 마주치는 것 피하려고 쓴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었가?
미국에서 만든 습관이다. 2년 정도 지났을 때 얼굴에 피부 트러블이 생겼다. 라스베이거스나 LA, 애리조나는 해가 길고 따갑다. 20대에 노화가 눈에 두드러졌다. 그래서 얼굴을 많이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찾았다. 또 미국 투어에서는 외국 선수들이나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눈 마주치면 항상 아는 척 해야 하는 게 불편했다. 벙거지 모자를 쓴 뒤로는 좌우로 눈만 돌리면 되니까 편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둘 다 사실이다.

- 한국 여성들의 벙거지 패션을 만든 것 아닌가?
선수들한테서도 호불호가 갈렸다. 어떤 선수는 ‘너밖에 안 쓰니까 그건 트레이드마크’라고 했다. 또 누구는 ‘안보이게 낚시꾼처럼 쓰느냐’고 그랬다. 예전 국내 골프장에서는 여성 골퍼가 바이저나 선캡을 썼는데, 벙거지를 쓰면 참 실용적이다. 목, 귀, 얼굴이 안탄다. 하지만 벙거지도 잘 골라야 한다. 나풀거리는 것은 안 되고 각이 있는 게 좋다. 전지훈련 중에 이런 모자를 쓰는 선수들도 봤다. 그럴 때면 ‘아, 너도 이제 나의 세계로 왔구나’하고 생각했다.

- 수많은 남성팬이 있었고, 미모도 뛰어난 데 연애 경험은 진짜 없었나?
지금 와서 참 억울한 것이 꽃 같은 20대를 미국에서 다 보낸 것이다. 소개시켜 주겠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회 다니는 데 집중했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연락할 수 없고, 어떻게 연애를 하나 싶어 마음부터 먼저 접었다. 투어에서는 친구도 많지 않고, 내성적이었다. 마음을 열기엔 시간이 걸렸다. 나이 서른을 넘으면서 일본을 투어 무대로 택한 것도 한국이 가깝고 결혼을 할 수 있겠거니 싶어서이기도 했다. 소개팅은 그 무렵 한 번 정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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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벙거지 모자.


- 그래서 소개팅 남과는 잘 안되었나?
일본으로 무대를 옮기면서 소개팅 연락이 많았다. 단 한 번 나갔는데, 소문이 나더라. 어느 날은 ‘김영과 소개팅했다’는 사람이 나오더라. 하지만 그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나이가 있으니 사람을 만나도 결혼이 전제가 된다. 어린 나이가 아니니 이젠 확실하지 않으면 안 만난다. 그렇다고 조건 보고 사람을 만나자니 눈에서 불꽃이 튈 리가 없다. 앞으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남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나?
미국에서 투어 생활할 때 아이러브스쿨로 초등학교 단짝이 연락 왔다.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서 골프 외에 친구라면 인터넷으로 연결된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들밖에 없다. 친했던 여자 2명 정도, 동창회 하면 거의가 여자다. 골프장에 가면 남동생 여동생이 많았다. 골프장에서 만나 연습하고 그랬다. 투어를 다닐 때는 ‘정착을 하지 않으면 결혼을 못하겠다’ 싶었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지만 그래도 나이에 떠밀려 하는 것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언제든 할 수 있지 않을까?

- 이제 새 인생을 시작한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
투어 쪽에선 잘 했다고 생각한다. 프로로서는 18홀 라운드가 다 끝났다. 내 스스로 살아온 인생의 골프는 100점 만점에 98점을 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이제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보고 싶다. 내가 어떤 것에 행복해할지, 즐거워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올해는 뭐든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다. [헤럴드스포츠=남화영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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