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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 화두는‘민중미술’…콜라주 거장 신학철을 재조명하다
근현대사의 비극 ‘강렬한’ 기법으로 표현
‘모내기’ 작품으로 표현의 자유 논란 불러
아내 10년 넘는 병간호 끝 작품활동 재개
“민중그림 속 진정한 의미 부각 소망…
그려놓을 것만 그려놓고 고향가고파”


민중미술가 신학철(72)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언급된다. 1960년대 미술그룹 AG(아방가르드협회)에서 활동했고, 1985년 김정헌, 임옥상, 오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를 구축했으며, 1987년 ‘모내기’ 그림 사건으로 한국미술사에서 표현의 자유와 검열 문제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다.

올해 국내 메이저 갤러리들이 여는 민중미술 전시에 신학철이라는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가나아트센터 기획 그룹전이 2월 초 예정돼 있고, 학고재갤러리는 9월 신학철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지난 8일, 신 화백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에서 만났다.

신 화백은 10여년간 아픈 아내 병수발을 해 왔다. 붓을 들 새가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지난해 봄, 아내를 저 세상에 떠나 보냈다.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기로, 까칠(?)하기로 소문난 신 화백은 소문과는 달리 따뜻하고 다정한 어른이었다. “대중언어를 잘 못 쓰고 말투가 거칠어서 걱정”이라고 했지만, 느린 말투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가는 내내 웃는 그에게서 투사의 이미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래된 화구들과 커다란 캔버스.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 거실 햇볕 잘 드는 한 켠이 바로 신학철 화백의 작업실이다. 십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던 부인을 지난해 봄 떠나 보
낸 후 혼자 지내게 되면서부터 집안 곳곳은 사진 자료와 콜라주 등 작품 활동을 위한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민중미술도 결국 상업화=“글쎄요. 상업화 돼 가는 거죠. 가격으로 판단하는 거니까요. 민중미술은 사회운동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현상은 그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어요. 비싸게 사 주면 좋긴 한데. 장삿꾼들은 돈 되는 걸 정확히 알잖아요.” 국내 미술계가 화두로 내 건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 신학철은 의외로 무덤덤했다. 돈 되니까, 팔리니까 시장에 나오는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다.

“제가 잘 쓰는 표현인데, 나는 니들 욕하면서도 내 그림 팔아 먹는다 그래요. 안 팔아야 하는데 차라리…. 아유 참, 또 묵고(먹고) 살라고 하니. 허허”사실 신학철의 그림은 편히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다. 1980년대 콜라주나 유화 작품들은 피부와 살점, 근육과 힘줄이 캔버스 밖으로 터져 나올 듯 세고 강렬하다. 그러한 직접적인 이미지 언어로 한국 근ㆍ현대사를 기록해왔다. “사변적인 것보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믿는다”는 화백은 현대미술의 주류였던 ‘무(無)이미지’를 당당히 거부해 왔다.

신 화백 작품의 주요 컬렉터로는 2007년 작고한 민중미술 컬렉터이자 영창 대표였던 청관재 조재진 씨와 가나아트 이호재 회장 등이 꼽힌다. 이후 일부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ㆍ공립 미술관에 기증 형태로 들어가게 됐다.

정작 신 화백이 갖고 있는 그림은 한 점도 없다. 다 팔았기 때문이다. 때론 ‘공짜’로 팔기도 했다. 각종 정치, 사회단체에서 그를 필요로 하며 찾아올 때마다 신 화백은 그림과 함께 그의 이름 석자도 내 줬다.

“1980년대에 다 줘버렸죠 뭐. 사회단체에서 기금전 하고 그럴 때 다 내줬어요. 100호짜리도 주고 그랬으니까. 민미협 화가들이 그랬어요. 자기 돈 들이고 몸으로 때우며 문화운동을 했죠.”

표현의 자유, 10년의 저항=신학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모내기’ 그림이다. 한국 미술계 표현의 자유와 검열 논란의 상징이 된 그림이다. 신 화백은 이 그림 때문에 석달 간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다.

모내기 그림은 1987년 민미협 통일전 때 신 화백이 출품했던 작품인데, 1989년 한 청년단체에서 부채를 제작하며 이 그림을 사용했고, 당시 부채 제작을 맡았던 학생이 ‘이적 표현물 제작 및 운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신 화백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1,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2000년 대법원이 원심 파기환송하며 징역 10월형의 선고 유예와 그림 몰수 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는 표현의 자유 침해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판결 취소 등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림을 위 아래 반으로 나눠 놓고는 위는 북한, 아래는 남한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통일의 이미지로 이걸 그린거예요. 통일된 세상의 무릉도원으로. 쓰레질 하는 모습은 통일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쓸어내는 거고요.”

‘그들’이 백두산이니, 만경대니 이적 표현물이라고 주장했던 그림의 배경은 사실 신 화백의 고향 김천의 모습이다.

“가만 그려보면 고향이 꿈 같아요. 봄에는 보리밭이 파랗고, (볏짚, 밀짚으로) 이어놓은 지붕은 노오랗죠. 그리고 그 위로 분홍 살구꽃이 화악 피는 거예요. 그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해요. 무릉도원이죠. 그런 걸 자꾸 이 놈들이 만경대라고 하니. 허허.”

아내 떠난 자리에서, 다시 붓을 들다=“헌신적이었죠. 모내기 그림 때 고생을 좀 했을 거예요. 이틀에 한번 꼴로 의왕구치소까지 면회오고 그랬으니까. 석달간 구치소 살다 나와 만나니 (살이 빠져서) 젖가슴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휴….”

이 화백의 아내는 2002년부터 파킨슨 병을 앓았다. 그런 아내를 13년 동안 보살폈다.

“나는 내 생각, 그림 생각만 했지 다른 건 못해요. 은행도 동사무소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슴이 먹먹해오더라고요. 이제는 김치 담그는 거, 고추장, 된장 담그는 것도 다 내가 해요.”다행히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이 잘 돼 있어 병원비로 고생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TV 뉴스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

“세상이 좀 바로 됐으면 싶어요. 민중미술이 뜨면 그 안에 있는 의미까지 같이 조명돼야 하는데 정작 그러질 못 하네요. 어찌보면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에 문화 역동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려 놓을 것만 그려놓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다”는 그에게 그림은 ‘의무’같은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가로 20m길이의 캔버스에 압축시켜 놓은 대작 ‘갑순이와 갑돌이(1998-2002)’의 앞 뒤 이야기를 조금 더 연결시킬 생각이다. 더불어 4ㆍ19, 5ㆍ18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 역시 그의 붓 끝에서 생생하게 기록될 예정이다.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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