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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배우를 떠나 보내며…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나는 이 길을 왔어. 다른 어떤 길도 아닌 배우의 길을.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이 길을 죽을 때까지 가는 거야. 그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평생 모르는 채로 말이야.” <2004년 백성희 자전적 연극 ‘길’ 中>

“연극에 인생을 건 사람들아. 주저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곧장 가게. 그러면 거기 극장 문이 열리고 관객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90살이 되도록 무대에 섰던 그가 어디선가 자네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네. 무대에 서기를 열망하는 자들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 거야.” <고 백성희 선생에 바치는 연출가 이윤택의 조시(弔詩) 中>


한국 연극계 거목, 백성희(1925-2016)가 떠나던 날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백성희장민호극장(서울 용산구 청파로)에서 열린 영결식엔 200여명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들었다.

영결식 사회를 맡은 배우 손숙은 “울지 않고 행복하게 선생님을 떠나 보내드리겠다” 했지만, 조사(弔詞)를 읽어내려가던 연출가 손진책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극장 내 여기저기 눈물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내게 연극배우 백성희에 대한 기억은 2001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유지태)의 치매 걸린 할머니가 전부다. 버스와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라며 실연당한 손자를 다독이던, 어느 봄날 연분홍 한복을 차려입고 대문 밖을 나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다.

대한민국 연극 1세대 원로배우이자 대배우이지만, 기억할만한 그 무엇이 일천한 기자에게 고인을 떠나 보내는 영결식장은 그저 일상적인 취재 현장에 불과했다.

갑자기 울컥해진 건 안숙선 명창이 조창(弔唱)을 할 때였다. 연출가 이윤택의 조시를 안숙선 명창이 읽어 내려갔다. 고인에게 바치는 시(詩)였지만 이 땅에 연극하는 모든 이들에게 연출가의 입을 빌어 보내는 고인의 위로처럼 들려왔다.

고인은 70여년을 무대 위 배우로 살았다. 90세를 앞둔 나이에도 무대에 섰다. 연극에 인생을 건, 수많은 춥고 배고픈 이들의 동료이자 선배였다.

향년 91세. 고인은 천수를 누렸다하는 나이에 마지막까지도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많은 연극인들은 그런 고인을 보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연극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춥고 배고프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인지 희극인지 평생 모르는 채’ 그 길을 숙명처럼 가야만 하기 때문에. 그 춥고 배고픈 길을 먼저 걷다 따뜻한 봄날이 오기도 전에 가버린 고인에게서 어쩌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2011년 ‘3월의 눈’을 연출했던 손진책은 “계절이 되면 내리는 눈처럼,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를, 무대를, 한국 연극을 지켜봐주시리라 믿는다”고 했다. 계절이 되면 내리는 눈처럼 그가 다시 돌아오는 날은 대한민국 연극계에도 봄볕 드는 날이기를 고대해본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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