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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동아 김현치 회장과 ‘비운의 황태자’ 권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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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윤(왼쪽)의 전성기 시절 경기 장면.



시대를 앞서 간 복싱인

1991년 12월 17일 오사카 부림 체육관에서 열린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타이틀매치에서 한국의 유명우가 일본의 이오카를 상대로 18차 방어전을 치렀다. 유명우가 접전 끝에 판정으로 패했을 때 15년 동안 막강 동아체육관을 이끌던 김현치 회장은 곧 한국 복싱에 IMF가 닥칠 것을 직감했다. 이후 서서히 프로모터 활동을 접는 것을 신중히 검토했고, 곧 실행에 옮겼습니다(김회장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1993년 11월과 12월 문성길과 변정일이 각각 챔피언 벨트를 풀면서 한국 복싱은 무관으로 전락되었고 1999년 10월 가뭄의 단비 같은 최요삼의 WBC 라이트플라이급 정상등극이 나왔지만 이후 최요삼은 무려 2년 4개월 동안 단 3차례의 방어전을 치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국복싱은 흥행침체가 시작됐습니다).

이때 동아체육관에서 최고 유망주 중 한 명이 바로 권희윤(70년생 무안, 현 인천경인복싱클럽 관장)이었습니다. 당시 만 21살의 권희윤은 9전 전승 7KO를 기록하며 차세대 챔피언으로 기대를 한껏 모았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91년 11월 거인체육관의 김재현을 10라운드 판정으로 꺽고 밴텀급 한국챔피언에 올랐고, 무려 15개월 만에 어렵게 성사된 1994년 4월 동양 주니어페더급 타이틀 도전에서 적지(인도네시아 자카르타)임에도 불구하고 아디바바라마마를 7회 KO로 꺾고 동양챔피언이 됐습니다. 이런 와중에 최재원(67년생, 동아체육관)이라는 또 한명의 ‘비운의 황태자’도 그 해 7월 미국에서 윌프레드 바스케스(61년생, 푸에르토리코)라는 챔피언과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전을 미국 원정경기로 치렀지만 2라운드에 허무하게 무너지며 한국인 미국원정 연패기록을 22로 늘렸습니다. 최재원은 당시 18전 전승이었지만 1990년에는 단 한차례도 경기를 치루지 못 할 정도로 최악의 침체기였고, 1991년 2월 박윤섭과의 라이벌전에서 화려한 테크닉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경기도 무려 1년 5개월 만에 열린 것이었습니다.

사기가 떨어진 천재

다시 권희윤 얘기로 돌아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희윤은 10개월 후에 치러진 방어전도 적지인 일본에서 치른다는 김현치 회장의 얘기를 듣고 ‘남아 있는 선수를 설거지(?) 하려는 수순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군인만 사기를 먹고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권희윤은 의욕은 땅에 떨어졌고, 일본 원정 1차방어전에서 무력하게 판정패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복싱인생을 접었죠. 종신 전적 17전 15승 2패 8KO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권희윤이 불운의 복서였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기억은 1994년, 나중에 세계챔피언이 되는 지인진과 밴텀급 한국타이틀전이 추진되다가 끝내 무산됐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많이 안타까웠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권희윤은 챔피언이었고 데뷔전 패배 후 욱일승천으로 뻗어 오르는 지인진과의 경기는 승패를 떠나서 마치 프리메라리가의 바로셀로나FC-레알마드리드 라이벌전처럼 빅카드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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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C 페더급 챔피언 이인규를 지도하고 있는 권희윤 관장(오른쪽).


이제는 지도자로

최근 권희윤(관장)은 제게 “의욕을 가지고 키우는 선수가 한 명 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인규(25, 명지대 영문과 휴학 중)라는 선수로 KBC 페더급 한국챔피언입니다. 권 관장은 지난해 이 선수를 필리핀으로 3개월간 전지훈련을 보낼 정도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습니다. 최악의 흥행침체에 빠져 있는 한국 프로복싱에서 경비만 500만 원이 소요되는 해외전지훈련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권 관장이 미래를 보고 아낌없이 투자한 것이죠.

이인규는 근성이 있고 좌우연타가 일품입니다. 아쉬운 것은 부상과 복싱침체로 제때 경기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나마도 한통 퀵화물이라는 회사의 대표인 박해봉(58년생) 씨가 경인체육관의 후원회장을 맡아 이인규에게 매달 일정액을 후원을 해줘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박해봉 대표는 제61회 전국체육대회 복싱경기에 대구대표로 출전했던 경기인 출신인 까닭에 복서들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분입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이 박 대표가 전국체전 8강에서 판정으로 패했던 선수가 동아체육관의 박제석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에게 아픔을 준 라이벌 체육관 출신의 권희윤 관장을 돕고 있는 것이죠. 박 대표는 여력이 다할때까지 성심성의껏 지원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차원에서 권희윤, 박해봉, 박제석 이렇게 3명은 매주 일요일마다 체육관 발전을 위해 산행을 함께 하는 등 멋지게 의기투합을 하고 있답니다. 이런 모습 참 멋지지 않나요? 스포츠인들은 이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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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산행 후 의기투합을 하고 있는 3인방. 왼쪽부터 권희윤 박제석 박해봉.



박제석(63년생, 경기도 화성)도 사실 ‘비운의 황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추어 시절 국제 대회 5관왕을 달성한 명복서였죠.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킹스컵 금메달리스트인 이범엽(동아대)을 세 차례나 꺽은 것을 비롯해, 황동룡(군산체육관) 장흥민(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 안현문(김명복배 최우수복서) 박규관(목포대 국가대표) 한정훈(현 대전대 감독) 등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면서 모두 승리를 거둘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뽐냈습니다. 프로로 전향한 후에도 장정구와 타이틀매치를 벌였던, 멕시코의 강타자 이시드로 페레스를 꺽고 세계랭킹에 진입했죠. 하지만 당시 동아체육관이 폐업을 눈앞에 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무려 두 체급이나 위인, 그 유명한 강타자 카오사이 갤럭시(태국)를 상대로 WBA 주니어밴텀급 타이틀매치를 벌여 5라운드 KO패를 당했습니다. 이 경기도 적지인 태국 방콕이었고, 박제석도 이 패배 후 복싱인생을 접었습니다. 현재는 우체국 택배를 담당하는 작은 회사의 사장으로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종신전적 16전 14승 2패 5KO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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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로 활약할 당시의 박제석.



김현치가 얻어낸 아파트

화제를 돌려 김현치 회장의 아마추어 선수 생활 때 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김현치는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이트급)입니다. 당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이었죠. 불과 2년 전 청와대를 목표로 무장공비가 침투한 1.21 사태가 있었고,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푸에블로 납치 등 연이은 악재로 남북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그래서 방콕 아시안게임은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대회였습니다. 또 이 대회는 본래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했지만 능력 부족으로 반납하면서, 25만 달러의 위약금까지 물었던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아시안게임 몇 달 전 당시 대한체육회 부회장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 사위인 장덕진 씨가 태릉선수촌을 방문해 복싱에서 금메달을 딸 경우 당시 집한채 값인 100만 원씩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선수들의 눈에 쌍불이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툭 하면 태릉선수촌을 벗어나 밤이 되면 얼큰하게 술 한 잔씩 마시고 들어오던 지용주도 금메달을 향해 모든 것을 접고 운동에 매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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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체육관의 김현치 회장.



워낙 당근이 컸기에 ‘당근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방콕에서 한국 복싱은 6개의 금메달을 수확했습니다. 1962년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가 전 종목에서 수확한 금메달이 불과 4개뿐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정말 엄청난 결과였습니다. 김현치는 라이트급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겹경사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획득하고 귀국한 선수들이 이후 격려금 지급을 기린처럼 길게 목을 빼고 기다렸지만 깜깜 무소식이었습니다. 김현치는 오랜 장고 끝에 소리 소문 없이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조선일보에 연락, 기자들을 만나 공직자 장덕진 씨가 선수들을 우롱하는 처사를 실랄하게 성토하는 기사가 나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곧 바로 태릉에서 짐을 싸서 나와 서순종 세기 프로모션 회장을 찾아 프로행을 선언해버립니다.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자 정부 당국은 복싱 금메달리스트들에게 파격적으로 아파트 분양권을 주었습니다. 당시 분양권 가격이 200만 원을 호가했다고 하니 김현치로 인해 복싱선수들이 큰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김진길 관장에 따르면 현재 김현치 회장은 강남에 건물을 보유하고 있고, 주로 미국에 살면서 한국을 자주 다녀간다고 합니다.

명석함과 집념을 함께 가졌던 복싱인

분명 김현치라는 복서는 재능도 뛰어났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는 원래 체급이 라이트급(60kg)임에도 불구하고 소리 소문없이 최종 선발전에는 두 체급 아래인 밴텀급(54kg)으로 출전해서 현재 KBF 심판인 이광우를 꺽을 정도로 집념이 강한 복서였습니다. 왜냐하면 라이트급에서 이창길의 죽창같이 쑤시는 스트레이트에 KO패를 당한 일이 있었고, 페더급(57kg)에서는 아시안게임 2연패인 김성은의 캥거루 복싱에 무릎을 꿇은 바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육지책으로 체중을 10kg 이상 감량하며 올림픽 출전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선수가 바로 김현치였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런 김현치의 심중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더라도 김현치라는 사람은 총명한 두뇌와 함께 강한 의지도 겸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프로모터로도 한국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비운의 3인방(권희윤, 박제석, 최재원)은 달이 기울 듯이 동아체육관의 침체기 때 전성기를 맞이했던 불운한 복서였습니다. 세계챔피언은 실력뿐 아니라 천운도 따라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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