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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카페]죽음보다 더 나은 ‘메르헨의 길’
평생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한 당나귀는 늙어 일을 못하게 되자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 당나귀는 브레멘 음악대장이 단원을 모집한다는 소릴 듣고 자유를 찾아 용기를 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길 위에서 노래를 잘하고 싶은 수탉, 입 냄새가 심한 개, 쥐를 잡지 않았다고 쫒겨난 고양이를 만나 같이 떠나자고 권유한다.

그림 형제가 펴낸 ‘그림 동화집’에 나오는 브레멘음악대 이야기다. 이들은 사람으로 치면 B급 인생이다. 그런데 이런 못난 이들이 꿈과 목표를 향해 손을 잡고 길을 떠난다.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찾아서다.

‘백설공주’‘헨젤과 그레텔’‘개구리 왕자’‘브레멘 음악대’‘라푼젤’‘신데렐라’ 등 누구나 한번 쯤 읽은 그림 동화의 작가의 처지와 당시 시대적 상황도 그랬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 아래 시달리고 있었고, 그림 형제 역시 하루 한끼 식사로 견뎌야 하는 위기의 시기였다.

그림 형제의 길/손관승 지음/바다출판사

’그림 형제의 길‘(바다출판사)은 저자가 20년 동안 그림 형제를 마음에 품고 자료를 모으고 삶의 궤적을 좇은 인문기행서이자 평전이다.

그림 형제를 동화작가로만 알고 있었다면 큰 오산이다.

둘은 무엇보다 독일 언어학의 기틀을 마련한 언어학자로서 업적이 크다. 형 빌헬름은 게르만 언어학의 창시자로서 ‘독일어 문법’‘독일어사’를 펴냈으며, 독일 최초의 방대한 사전인 ‘독일어사전’을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그림 형제가 태어난 프랑크푸르트 외곽 하나우에서 시작하는 그림 형제의 길, ‘메르헨 길’을 따라가는 여정을 담아냈다.

메르헨은 옛 이야기, 동화라는 뜻. 학술적으로는 민담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길은 그림 형제의 하나우의 시청 앞 동상에서 시작해 마을 전체가 그림 형제 기념관이라 할, 성장기를 보낸 중세도시 슈타이나우로 이어진다. 마르부르크는 그림 형제의 대학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좁은 골목과 계단으로 유명한 이 도시에서 형제는 책에 빠져 지냈다. 돈이 없어 책을 빌리며 두 개를 베껴 하나는 다른 학생에게 팔기도 했다. 저자는 그림 형제가 동화집을 쓴 카셀, 괴팅겐, 하멜른, 브레멘까지 그림 동화의 배경이 된 곳과 그림 형제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을 이어간다. 600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길 위에는 60여개 도시와 마을, 8개의 국립공원이 포함돼 있다.

잘 나가는 언어학자들이 왜 아이들이나 읽는 동화집에 매달렸을까. 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운 건 나폴레옹의 침략. 독일 통일에의 갈망이었다. 독일이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게 분열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형제는 독일 민족을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화의 통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게르만 민족의 역사, 신화, 전설, 민화 등에 대한 열을 올렸다.

1815년 발간된 초판 발행은 순조로웠다. 그 후 재판을 거듭하면서 7판까지 이어졌다. 일부 성적인 묘사는 삭제했다.

둘은 서로에게 버팀목이었다. 한 살 차이로 태어난 형제는 친구이자 연구동료였다. 평생 한 지붕 아래 살면서 가난과 실직, 전쟁과 침략의 시련 앞에서 둘은 굴복하지 않고 끈기와 투지, 기개로 헤쳐나갔다. 둘이 주고 받은 편지는 60여년 간 600통. 이들이 평생교유한 1400여명의 인사와 주고 받은 편지는 3만여통으로 이들을 정리해 서간집을 내는 ‘50년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고 한다.

형제는 또 35권 가량의 책을 썼고 논문을 포함해 700편에 이르는 저작물을 세상에 남겼다. 독일이 자랑하는 인문학의 기틀을 구축하고 게르마니스틱이라고 하는 독어독문학을 창시한 것도 이들이다.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도 이들의 족적은 화려하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벌어진 ‘괴팅겐 7교수 사건’. 1837년 독일 괴팅겐 대 교수 7명이 헌법 개혁에 반대하다 파면당한 사건에 앞장서는 바람에 해직 교수가 돼 실직자 신세가 된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한 빈 회의와 파리 회의에서는 외교관으로서 활동하고 독일 최초의 국민의회를 이끌기도 했다.

책에는 그림 형제와 괴테와의 만남 등 당시 에피소드와 저자가 여행지에서 경험한 놀라운 일, 도시의 역사와 스토리 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림 형제가 이야기를 수집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렇다면 왜 지금 그림 형제일까. 그림 동화집은 역사상 최고의 콘텐츠라 할 만하다. 지금 전하는 40여편의 이야기는 영화 애니메이션, 뮤지컬, 드라마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메르헨의 길’은 과거 상업루트 처럼 ‘돈줄’이 되고 있다.

이야기와 그림 형제의 삶이 보여주는, 역경에 굴하지 않고 걸어내는 길에의 집념도 느껴볼 만하다. 저자는 여기에서 스스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데 큰 힘을 얻은 듯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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