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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왕실-<22> 아랍에미리트]두바이 군주가문‘마크툼家’ 물류·관광·도심개발로 석유고갈 극복
두바이 군주 가문인 마크툼가의 뿌리는 원래 아부다비였다. 1833년 셰이크 마크툼 빈 부티가 총 800명을 이끌고 아부다비로부터 북동쪽으로 140㎞ 떨어져 있는 지금의 두바이로 이주하면서 독립된 세력을 형성했다.

20세기 초까지 교역과 천연진주 채취가 경제의 대부분이었지만, 수에즈 운하 개통과 양식진주의 등장, 대공황 등으로 전통적인 경제기반은 몰락한다. 

두바이 경제를 살린 것은 아부다비 군주 자이드와 손잡고 석유개발에 나선 1958년 즉위한 8대 군주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마크툼이다. 그런데 1966년 개발한 두바이의 석유는 아부다비와는 달리 급속도로 고갈됐다.

라시드는 쿠웨이트에서 돈을 빌려 크리크를 준설하고 지역의 물류 거점으로서 새롭게 인프라를 정비했다. 두바이 국제공황, 제벨 알리 자유무역특구(JAFZA)도 개설했다.

덕분에 두바이는 아라비아(페르시아) 만 일대에 머물지 않고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동해안을 잇는 물류의 거점으로 도약했다.

라시드 국왕은 남다른 정치력도 발휘했다. 1971년 아부다비와 손잡고 아랍에미리트 출범을 주도하면서 연방 내 2인자의 위치를 확보했다.

1990년 라시드의 장남 마크툼이 자리를 이었지만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2006년 사망한다. 두바이 통치권은 동생인 모하메드에게 이어진다.

모하메드는 부왕인 라시드 만큼이나 적극적인 개혁에 나섰다. 무엇보다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에 적극적으로 힘썼다. 2010년 두바이 사태로 타격을 입었지만, 아부다비의 칼리파 국왕에게 도움을 받아 투자를 이어갔다. 다만 그 대가로 자신이 소유한 세계 최고층빌딩 부르즈 두바이(Bruj Dubai)의 이름을 부르즈 칼리파(Bruj khalifa)로 바꿔야 했다.

모하메드는 이후 두바이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관광’에 초점을 맞췄다. 2009년 두바이 2015 개발계획을 수립해 대형 테마파크를 건립을 추진했다. 개관예정인 레고랜드와 세계최대 수중 테마파크 ‘펄 오브 두바이(Pearl of Dubai)’가 그 결과물이다. 모하메드는 자신의 이름을 건 새 도심개발 계획 ‘모하메드 빈 라시드(MBR)시티’도 구상하고 있다. 경마광(狂)이기도 한 모하메드 왕은 역대 최고인 1억50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두바이 월드컵’ 을 창설하기도 했다.

두바이의 마크툼 가문은 다른 중동의 왕가와 달리 왕자간 갈등이 거의 없다. 라시드 국왕 이후 동복형제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형제 간 결속력도 견고하고 의사결정에 큰 무리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7명의 아들과 10명의 딸을 둔 모하메드 왕의 후계자는 둘째 아들 함단 빈 모하메드다. 장남 라시드 왕세자가 지난 9월 심장마비로 사망해서다.

마크툼 가문은 UAE 연방의 2인자이지만 정부 요직에는 많이 진출해 있지 않다. 두바이에서는 부동산개발, 서비스 산업 등의 민간부문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마크툼 가의 왕족도 주로 민간기업의 요직을 맡고 있다.

UAE의 2인자 가문이 이처럼 민간에 무게를 두면 1인자 아부다비와 갈등을 빚을 확률도 그만큼 낮다. 두바이는 정치보다는 경제에 최적화된 정치집단이 되는 모습이다. 

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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