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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데이타] 민주투사에서 권력자로...수치의 변신은
[헤럴드경제=홍길용 기자] “저는 대통령 위에서, 의사결정을 할 겁니다. 저는 승리당의 지도자입니다”

미얀마 총선에서 압승이 확실시된 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자녀의 외국(영국) 국적 때문에 대선 출마를 못하지만,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결과라 넘길 수도 있지만, 사실상 대통령 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발언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면 아웅산 수치의 강력한 정치 에너지, 권력 의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배신’에 대한 응징의 의지, 올바른 역사확립에 대한 의지로 분석된다.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에 살던 아웅산 수치는 19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잠시 귀국한다. 이 해(1988년) 8월 8일 양곤에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8888항쟁’이 벌어지고,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가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1990년 총선에서 압승도 거뒀다. 하지만 다시 군부정권은 선거를 무효화한 후 아웅산 수치를 탄압하고, 미얀마 군대의 창시자이기도 한 아웅산 장군의 모든 흔적들마저 없애려했다. 이번 선거 승리로 수치 여사는 군부의 ‘배신’을 응징하고, 이들이 왜곡한 아버지의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게 된 셈이다.

해외의 든든한 지원도 수치 여사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에너지다.

부친인 아웅산 장군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영국의 식민정부에서도 일했다. 영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완전한 독립’을 얻기 위한 현실정치의 결과다. 수치 여사도 노벨평화상 수상을 계기로 세계적 유명인사가 됐고, 덕분에 미얀마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촉매가 됐다. 수치 여사가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미국은 경제제재를 풀었고, 일본은 6조원이 넘는 지원을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했다. 물러나는 테인 세인 대통령의 경제정책이 성과를 거뒀다는 해석도 있지만, 수치 여사가 아니었다면 이루기 어려웠을 성과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최강 권력집단인 군부와의 관계다. 군부는 국가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거부할수 있는 권한은 물론 핵심 관료에 대한 임면권도 쥐고 있다. 당장은 군 사령관 출신의 측근을 요직에 기용해 타협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개헌을 포함한 주요 의사결정에서 군부와 대립할 경우 또다시 물리적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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