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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67. 취객에도 총 겨누는 남미…잊지 못할 ‘마지막 밤’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남미여행의 마지막 밤.

드디어 이 밤이 오고야 말았다. 뭄바이에서 마드리드를 거쳐 페루에 도착하던 날, 태평양을 바라보며 이 바다의 반대편 저 머나먼 끝에는 한국이 있을 거라며 설레던 그 아침이 떠오른다. 배낭을 꾸리는 아쉬움과 다음 기회에 다시 오게 되리라는 즐거운 예감으로 마무리되는 남미에서의 여정이다.

​어느 날 눈에 들어온 우유니 소금사막 때문에 시작된 남미로의 로망이 실현되었다. 우유니를 꿈꾸고, 거기에 가고, 별을 보고, 상상하지도 못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이곳에서의 추억들이 아쉬우면서도 앞으로 가야할 일정을 확인하는 마음에는 또다른 바람이 불어온다.

이곳 빠라찌는 완전한 휴양지다. 호핑투어나 정글투어 하러 오는 마을이지만 그런 종류의 투어는 하나도 안하고 작은 마을의 정취나 흠뻑 느끼면서 하루를 보낸다. 곧 스페인으로 떠날 예정이라 짐이나 정리하며 무더운 하루와 씨름을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다른 여행자에게 주기도 하고 그렇게 배낭을 비워 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배낭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그렇게 짐을 싸 놓고 불타오르던 태양이 사그라지고 나서야 거리로 나선다. 어제와 같은 흥청거림을 기대했지만 월요일이라 공연장은 비어있고, 거리 예술가의 작은 공연도, 노점들도 없다. 레스토랑과 여행자를 위한 각종 매장들만 옹기종기 불을 밝히고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작은 마을의 소박한 흥청거림이 떠나는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단 하나 불 밝히고 있는 노점은 어제의 까이비리냐(Caipirinha)를 마셨던 그곳이다. 상큼한 레몬향과 사탕수수증류주인 삥가(Pinga)의 맛이 생각나 군침이 고인다. 어제 두 잔이나 먹었던 터라 기억하는 아저씨와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한 잔 사들고 바다로 간다. 이상하리만큼 까이삐리냐가 나에겐 잘 맞는다.

주위의 크고 작은 섬들을 연결하는 보트들이 매여 있는 선착장을 지나 밤의 해변으로 간다. 보이지 않는 까만 바다에서는 오직 파도소리만이 끊이지 않고 철썩거린다. 암흑의 밤바다라해도 리오데자네이루의 아름다운 해안선의 연장일 것이다. 그 화려한 리오의 해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오늘밤 빠라찌의 항구가 나에게는 더욱 특별하다. 잠깐의 쉼도 없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사람의 말이라는 소음을 사라지게 한다. 여행 떠난 지 두 달이 넘는 시점, 가슴 한 구석 외로움이 파도와 함께 밀려오다가 멀어져가기를 반복하다 차츰 옅어진다. 헤어지게 될 동행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바닷가에서 센트로로 돌아오니, 편히 쉬러온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휴양지라 그런지 밤이 늦어도 불빛은 여전하다. 그림이나 잡화를 파는 매장, 옷가게, 기념품가게, 독특한 플립플랍을 진열해 놓은 신발가게 등 온갖 매장들을 괜히 들락날락해 보지만 마음은 싱숭생숭하다. 바닷가에서 이별의식을 치르고 왔는데도 떠난다는 아쉬움이 자꾸 미련처럼 남는 것이다. 여기가 라틴아메리카의 어디쯤인지, 내 여행의 어느 만큼인지 자꾸 확인하고 뒤돌아보게 되는 오늘이다.

늦은 밤 레스토랑 앞에서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다. 저녁은 이미 호스텔에서 만들어 먹었으니 노천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주문한다. 곧 헤어지게 될 동행들과 이런 저런 여행의 소회를 나누는데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술에 취해 몸도 못 가누는 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느 테이블로 자꾸 달려드는 것이다.

흔한 취객의 술주정인가 하고 쳐다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움찔하게 된다. 정중하게 경고를 계속하던 말쑥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은빛의 반짝이는 물체를 꺼내든 것이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총이다. 드디어 총격전을 보게 되나 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깜짝 놀라 움츠리는 기색에, 옆 테이블의 남자들이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준다. 하지만 실물로는 처음 보는 권총과 이 상황이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총의 위력은 그 존재가 눈에 띄는 것으로 정확히 나타난다. 시끄럽던 거리가 일순간 조용해진다. 총구를 겨눈 사람은 옆 레스토랑의 지배인쯤 되는 것 같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듯, 총을 든 사람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대처를 한다. 몸을 못가누고 소리를 질러대던 취객도 정신이 번쩍 나는지 뒷걸음질을 하며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거리는 원래의 소음으로 돌아간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은빛 총이 내뿜은 광채는 거기 있던 모두에게 순간적으로는 죽음의 은유였다. 죽음에 비하니 이별이나 떠남의 정서는 조족지혈이다. 갑작스런 총의 등장과 죽음이란 단어의 연상,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평정된 상황은 여행자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별하고 떠나고 어딘가에 도착하는 일에 온종일 곤두섰던 날카로움은 이 뜻밖의 장면을 계기로 무뎌진다.

삶에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여행도 그렇다. 떠남이, 새로운 만남이 호들갑스러운 감정의 파티가 될 필요는 없다. 어떤 상황을 담담히 마주하는 것, 자연스럽게 겪어내는 것이 의지가 아닌 기품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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