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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의 골프장 人문학]서울한양CC와 이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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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제2회 한국아마선수권에서 우승한 김흥조(왼쪽 두번째) 씨와 이승만 대통령(네번째), 이순용 서울CC이사장(다섯번째). (사진= www.88074.com)


서울한양CC와 한국 골프의 대부 이순용

한반도에 최초로 골프가 도입된 때는? 아마 최초의 골프장이 만들어진 때를 도입기로 잡아야 할 것 같다. 1896년 원산에 6홀 코스가 만들어진 것이 최초란 설이 있지만, 검증되지 못한 주장에 불과하고 실제는 1921년 6월 개장한 9홀 효창원 코스가 시초다. 효창원이 공원으로 바뀌면서 폐쇄되자 이어서 1924년 청량리에 9홀 골프장이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골프 코스는 왕릉 주변의 조선호텔 부속시설(효창원)이거나 대표 교통수단인 기차역(청량리) 인근에 조성되었다. 당시엔 총독부 고관과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고양시 원당에 위치한 서울한양컨트리클럽의 홀 깃발이나 야외 스코어보드를 보면 ‘1927’이란 숫자가 적혀 있다. 서울CC회원들의 친목 사이트인 ‘88074닷컴’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골프는 1926년 순종(純宗) 승하 이후 이은(李垠)이 영친왕으로 계승한 이듬 해인 1927년부터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1927년에 영친왕은 경성골프구락부(클럽을 일본식 발음으로 구락부라 불렀다)의 명예 총재가 되고 일본의 아마추어 동서대항대회에서 이왕배(李王盃) 트로피도 하사했다.

오늘날 서울대공원인 능동(陵洞 군자리)의 왕실 땅에서 골프장 건설을 위한 착공(벌목)을 1927년 6월 11일부터 시작하고, 그해 영친왕은 좋은 코스를 만들기 위해 유럽으로 골프장 답사를 떠났다. 군자리 코스의 총공사비 5만 5,000원 중에 운영을 맡을 경성골프구락부가 1만 원, 나머지는 영친왕이 부담하고 매년 5,000원의 보조금을 영친왕이 하사키로 하고 1930년에 공사가 완료되어 18홀 코스로 정식 개장한다.

88074닷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골프장을 건설하는 원년(元年)이 1927년이니 따라서 한국골프의 역사는 1927년부터이며 건국 이후에 그 전신을 이어받아 창립(1953)한 사단법인 서울컨트리클럽은 1927년 그 자체가 클럽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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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의 군자리 시절 서울CC에서 라운드하는 골퍼.


서울CC 설립에 각종 대회 창설까지

88074닷컴에 따르면 서울CC 설립자 이순용(李淳鎔 1897-1988 Allen C. Wylie) 초대 이사장에 대한 얘기가 꽤 상세히 소개된다. 구한말 학부대신이던 이재곤의 7남1녀중 5남으로 태어난 이순용은 삼일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쫓겨 상해로 망명했고, 24세 때인 1921년에는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 선생이 쓴 소개장을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이승만을 만났다. 이후 해방 정국에서는 이승만의 권유로 43세의 고령으로 미군에 입대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CIA의 전신인 OSS요원으로 샹그리라(현재 캠프 데이비드)에서 장기현, 이문상, 현승엽, 조종익 등 11명과 함께 비밀 군사훈련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인도양을 거처 버마 등 남방전투와 중국까지 진주한 이순용 하사는 중국의 쿤밍에서 광복군의 이우전 회장 등과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9월9일 미 육군 24군단의 제224 CIC파견대 요원으로 24년 만에 조국에 발을 디뎠다.

일본을 통해 서울에 진주한 J.R.하지 미군 중장의 지휘하에 있던 CIC(오늘날의 CIA)의 담당관이 바로 미 육군중사 이순용이었다. 미국정보기관 CIC는 한국의 정치지도자와 친일파들의 동태와 일반인의 여론을 조사하는 등 대북관련 정보도 수집했다.

극심한 좌우 혼란 끝에 미국의 후원을 등에 입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고, 혼란기인 1949년11월에 다소 뜬금없이 골프코스복귀위원회가 창설되어 전쟁 준비로 43년에 폐허가 된 군자리 코스를 복구해 6개월만인 1950년 5월 재개장한다.

한국 전쟁이 지나고 서울CC는 1953년 착공에 들어가 1년만에 전광석화처럼 재준공하게 된다. 이때의 모든 재준공 과정을 진두지휘한 코스 설립자가 당시 외자청장이던 이순용이었다. 코스의 실제 재설계는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홀의 자취를 찾아 복구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전후 복구에 쓸 물자를 골프장에 쓴다는 이유로 비난이 쇄도했으나 이 청장은 전혀 구애받지 않고 공사를 밀어붙였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깔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통령은 주말이면 주한미군들이 일본 오키나와로 골프치러 가는 것을 우려했다. 군사력의 공백이 올 것을 두려워 해 골프장 복구를 적극 후원했다고 전해진다.

공사가 끝나고 나서 1954년 제1회 아마추어골프대회를 개최할 때 이 대통령이 참관했고, 이 대회를 향후 ‘대통령배’라고 부르게 된 것도 다 그런 배경이 깔려 있다. 결국 1회 대회의 우승자는 토마스 L. 메츠커라는 미군이었고, 58년에 열린 한국오픈의 초대 챔피언 역시 무어(혹은 무디라는 설)라는 미군이 우승했다. 남북이 대치한 당시 상황에서 미군들을 위한 레저시설 강화라는 이유가 서울CC는 창립에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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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코스 1번홀 가는 길에 놓인 이순용 설립자의 흉상.


이순용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이 한국 골프에 기여한 것은 서울CC를 만든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국아마추어선수권(1954년), 한국오픈(1958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1958년) 등의 골프대회를 만들어 국내 골프 저변 확대에 공헌했다.

1956년 2월에는 필리핀오픈에 허정구 단장과 연덕춘 프로 등으로 팀을 꾸린 해외경기 원정단도 파견했다. 그런가 하면 삼성물산(사장 이병철) 등 재벌을 법인 회원으로 영입하면서 재원을 마련했고, ‘정치깡패’로 알려진 임화수의 입회를 결단코 막아내면서 오늘날 ‘문신한 자 사우나 출입 금지’와 같은 골프장 문화의 기틀을 짜기도 했다.

연덕춘 프로에게는 후배 양성을 독려하기도 했다. 연 프로가 반신반의하며 ‘10년이 걸린다’고 하자 이순용의 말이 걸작이었다. “좋아. 10년이 걸리더라도 시작해야지. 시작이 절반 아닌가.” 그렇게 키워진 선수가 한장상, 이일안, 김복만, 조태운 등 오늘날 프로 골퍼 1세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다. 1960년에 4.19혁명이 나자 이순용은 이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장기영 이사장이 전권을 맡는다.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그도 운명을 함께 한 것이다. 곧이어 5.16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며 한산해졌던 골프장은 2년 뒤인 63년에 회원수가 555명을 헤아릴 정도로 급격히 늘었다. 회원 가입 열풍이 몰아닥치면서 64년에는 일본에서 본딴 최초의 예탁금 회원제 코스인 한양CC가 고양시 원당의 구릉지에 등장하게 된다.

이듬해인 65년에 장기영 이사장이 물러나고 기업인 박두병 씨가 3대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비로소 이순용은 특별명예회원으로 복권되었다. 하지만 말년은 우울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 CIA요원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지만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했고, 한국에 최초로 골프장을 만들어 한국골프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을 이룩했지만, 노년에는 미국정부 연금으로 청빈하게 여생을 보냈고, 1988년 별세하여 남긴 재산도 없이 유해는 경기도 김포의 선산에 묻혀 있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듯 인물은 가도 이름을 남긴다. 이순용 초대 이사장의 흔적은 군데군데 남아 있다. 서울CC 설립 30주년인 1983년부터는 ‘이순용배 아마추어골프대회’를 매년 개최했다. 신코스 1번 홀 나가는 입구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지난 93년에 제작한 흉상이 기단에 서 있다. 회원들의 동호회도 있다.

2008년 만들어진 ‘파라다이스 골프회’는 원래 ‘이순용골프회’였다. 한국 골프의 대부를 기리는 만큼 이들의 소속감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골프장 개장 기념일인 지난 9월13일에도 설립자 흉상 기단 주변으로 화환이 줄줄이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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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 2층에서 내려다본 구 코스 18번 홀.


서울한양의 옛 자취를 찾아

여름에 서울·한양CC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잠깐, 골프장 이름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72년에 군자리 능동의 서울CC가 청와대의 지시에 의해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뀌면서 서울CC가 졸지에 고양의 한양CC로 한 집 살림을 하게 된 때문이었다. 서울CC가 한양CC를 11억 원에 매입하는 방식이었다. 한 골프장인데도 부킹을 따로받고 회원관리도 따로 하는 이른바 ‘한 지붕 두 가족’ 골프장이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있다. 첫해 클럽챔피언은 서울에선 이교신, 한양에선 서태윤이었다.

당시에는 정권의 입김이 강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관악CC(현재의 리베라CC) 역시 원래 신림동 서울대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74년도에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다. 노태우 정부 이전에는 신규 골프장 설립 허가를 청와대가 내주었을 정도다.

코스를 좀더 들어가보자. 고양시 원당 서삼릉(西三陵)자락 56만평의 송림(松林)에 조성된 36홀 서울한양CC는 현재 국내 골프장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64년 9월 개장한 구 코스(파72, 5854m)는 안중희, 연덕춘에 의해 설계되었고, 신 코스(파72 6374m)는 70년9월 일본인 야기(八木武夫)의 기본 설계로 개장한 뒤 김찬수, 이일안의 감리로 리노베이션을 거쳤다. 잔디는 페어웨이는 들잔디(野芝)를, 그린은 벤트그라스를 쓰며 투 그린 코스다.

구 코스 1번 홀 티샷을 하고 페어웨이에 접어들면 오래되고 빽빽한 소나무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트가 바람과 함께 상쾌함을 전한다. 구 코스는 전장이 길지 않고, 워터해저드가 길을 가로막지도 않지만 오르막내리막 업다운이 심한 편이라 정교하게 거리 조절을 하지 않으면 스코어를 좀처럼 내기 힘들다. 옛 코스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가장 짧은 17번 홀도 레귤러 티에서 오르막 145야드 파3 홀이다. 그린은 둥글고 평평하지만 면적이 좁다.

신 코스는 이보다 넓은 페어웨이에 전장도 더 길다. 이곳에서 지난 86년 아시안게임이 열렸고, 한국 대표팀이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따냈다. 90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오픈을 매년 개최하기도 했다. 가장 긴 7번 홀은 629야드에 이른다. 젊은 회원이 늘고 장비가 좋아진 탓인지 요즘에는 신 코스가 구 코스보다 항상 먼저 채워진다.

하지만, 구 코스는 고졸(古拙)한 멋을 풍긴다. 코스 사이사이에 탑과 석물이 옛 코스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15번 홀 페어웨이 중간에 가지가 휘어질듯 놓인 소나무는 감정가로 6~7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코스를 구성하는 나무 한 그루가 문화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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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한양의 클럽챔피언전은 따로 치렀다. 서울의 경우 1회 챔피언은 1955년 아마선수권 우승자인 김흥조씨였다.


지난 71년 한양CC 클럽챔피언을 지낸 우승섭 대한골프협회 고문은 예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구 코스는 애초 모습에서 큰 변화 없이 몇몇 개 홀에 티잉 그라운드와 그린만 뒤로 뺐습니다. 5번 홀 페어웨이 옆으로는 민가가 있었고 철망이 있었죠. 지금은 철망 자리를 나무들이 채웠습니다. 9번 홀 그린에서는 한강이 내려다 보였죠.” 그 자리에는 이제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찼다.

한양은 2인승 카트밖에 없어서 걸어서 라운드 하는 코스다. 홀간 간격이 길지 않아 걷기에도 좋다. 4시간 20분 정도를 라운드하고 나오면 깊은 산속을 모험한 것 같다. ‘삼림욕 코스’라는 말이 정확하게 어울린다.

회원 중심의 골프장이다. 골프장에 와 기다리면 선착순으로 티오프 시간을 배정받는다. ‘열의만 있으면 일주일 내내 라운드를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킹에 어려움이 없다. 70세가 넘은 청수(靑壽)회원에게는 그린피가 더 할인된다. 게다가 일본의 이부스키(指宿)GC, 타이완의 타이완(臺灣)GC, 태국의 로열방콕GC 등 전 세계 10여 개의 골프장과 자매결연을 맺어 이들 코스를 방문했을 때 할인 혜택까지 받는다.

클럽하우스는 지난 85년 2층으로 증축했지만 개장 당시의 외양과 시설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1층 카운터는 60년대식 최고급 호텔 인테리어다. 바둑판, 장기판이 놓인 흡연실과 2층의 응접실을 둘러보다보면 일본의 오랜 골프장이 떠오른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신설 코스의 화려한 클럽하우스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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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이사장의 사진이 걸린 이사장실. 맨 왼쪽이 이순용 초대 이사장.


1층 로비 맞은편 벽면에는 회원들의 핸디캡 보드를 만들어 두었다. 컴퓨터 전산시스템으로도 관리하지만 보드를 걸어둔 건 이곳의 전통이다. 처음 봐서는 촌스럽지만, 다시 보면 회원들의 이름이 마치 대문 앞에 걸린 명패 같다. 내 실력이 올라가면 패찰도 한 계단 올라간다. 친구들을 초청하면 내 명패를 보여주며 자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회원이 주인답게 활보할 수 있는 골프장이라는 얘기다. 익숙한 내 응접실이기 때문에 바둑도 두면서 시간을 한가롭게 보내기도 한다. 2대에 걸쳐 골프장에서의 추억을 나눌 수도 있다. 한쪽에는 클럽챔피언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1955년부터 있는 건 서울CC회원들의 클럽챔피언이고, 1966년부터 있는 건 한양CC 클럽챔피언이다. 한 지붕을 쓰지만 두 가족이니만큼 로고도 다르다.

한국골프의 시작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보다 면밀한 논의가 더 진행될 필요가 있지만, 한국인에 의한 경성CC가 만들어진 1927년을 시작으로 보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그리고 53년에 설립자 이순용이 서울CC를 만든 것은 그것의 계승이었고, 그가 만든 대회들과 선수 육성으로 인해 한국 골프의 역사와 전통을 앞당길 수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본인의 말년은 우울했으나 뒤 세대가 그의 노력과 업적을 인정하고 오늘날까지 받들고 있다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헤럴드스포츠=남화영 기자]

* 글과 사진은 서울한양 회원 사이트(www.88074.com)에서 부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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