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7) 김철호 관장에 대한 추억
며칠 전 우연한 기회에 김철호 관장(61년 경기 화성 생, 전 WBC슈퍼플라이급 챔피언)과 독대할 일이 있었습니다. 김 관장을 가끔씩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김 관장은 제가 1983년 10월 20일 88체육관 선발대로 워커힐에 입성할 때 저의 트레이너였습니다. 그리고 군제대 후 1989년 4월 19일 88체육관에 트레이너로 입문할 때는 제 직장상사인 관장이었습니다. 이어 1994년 4월 김철호 관장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필리핀으로 떠날 때 저는 역사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젊은 날 가장 가슴 아픈 추억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김철호였습니다.

군제대 후 트레이너 생활을 한 지 40일 남짓 되어 1989년 6월 3일 당시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이던 김용강(65년 전남 화순 생)이 태국으로 건너가 3차 방어전을 치를 때였습니다. WBA 밴텀급 챔피언이었던 문성길의 트레이너도 같이 담당했던 이영래(41년 전북 부안 생) 씨가 태국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저는 흔히 말하는 ‘땜방’ 트레이너로 발탁돼 일주일 정도 문성길의 훈련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었습니다. 트레이닝이 끝났을 때 문챔프는 몹시 만족한 표정이었고 저는 대타로 출전해 만루홈런을 친 기분이었습니다. 문 챔프와 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지금까지 26년째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89년 7월 9일 문성길이 태국 원정 3차방어전에서 카오코 갤럭시에게 챔피언 벨트를 내준 후에 저는 자연스럽게 그의 트레이너가 됐습니다.

이미지중앙

필자가 프로 7전째 1라운드 KO승을 거뒀을 때의 모습. 김철호 관장도 옆에 있다.


88체육관의 김철호 관장

문 챔프의 트레이닝 중 김 관장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비화가 생각납니다. 한 번은 문 챔프가 샌드백을 때리는데 김철호 관장이 "야! 성길아, 너 잽을 낼 때 턱이 들려. 그 빈 공간을 오른손 글러브를 벌려 커버해봐"라며 지시를 했습니다. 이에 문성길은 갑자기 두 손을 내리고 김 관장을 응시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이내 곧 샌드백을 후려갈기더군요.

김 관장이 지시한 전법은 본인이 세계챔피언(5차방어 성공) 시절 즐겨 사용하던 수비 포메이션이었습니다. 문성길은 탑으로 비유하자면 황룡사 9층 석탑처럼 웅장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 형상이라면, 김철호 관장은 석가탑처럼 수수하고 새색시 같은 이미지를 풍깁니다. 김철호의 복싱은 아기자기한, 일종의 ‘스몰권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반대의 스타일이 한 마디 하니 문성길 같은 슬러거가 보기에는 생뚱맞았던 겁니다.

그 일이 있은 후 김 관장은 문성길이 은퇴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훈련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습니다(사실 간섭해봤자 먹히지도 않았을 겁니다). 문성길 같은 선수는 장단점이 뚜렷합니다. 함포 사격처럼 터지는 용단포는 전율을 느낄 만하지만 순간적인 민첩성이나 순발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는 빈도가 많죠. 이런 선수일수록 장점을 극대화하면 자연적으로 단점은 줄어들기 되어있다는 것을 문성길 본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점을 신경 쓰다 보면 막강한 화력을 지닌 오른손 주포가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문성길은 1990년 1월 20일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19전 18승 14KO 1무를 기록 중이던 챔피언 나나코나두(가나)를 9라운드 부상판정승으로 꺾고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 한 체급을 내리는 강행군이었기에 훈련강도은 밴텀급 시절보다 한 단계 높았습니다. 그 추운 겨울 석 달 열흘 동안 혼을 집어넣으며 트레이닝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문성길 특유의 그 ‘함포사격’을 두 손으로 전부 받아낸 저는 승리의 순간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트레이너 비는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다음날 체육관에 출근했지만 김관장은 저를 보고 그냥 소 닭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됐고, 4차 방어전이 스페인 원정방어로 결정되어 모든 코칭스태프가 현지로 떠났지만 저는 제외됐습니다. 한마디로 同苦(동고)만 했지 同樂(동락)은 같이 누리지 못한 참담한 신세였습니다. 이 같은 제 개인적 아픔의 중심에 김철호 관장이 있었습니다. 문성길이 20차 방어를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김 관장의 이러한 매너리즘(mannerism)은 결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지중앙

방어전에 성공한 후 기뻐하고 있는 문성길(오른쪽)과 김철호 관장.


스타 문성길의 그림자


4차 원정방어가 성공리에 끝난 후 문 챔프가 미안했는지 저를 불러 모처럼 식사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 중 갑자기 심영자 88프로모션회장에게 전화를 걸더군요. 457-9223. 이 번호는 심 회장의 자택 전화번호였는데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문 챔프는 저에게 트레이너 비를 5% 책정해 달라고 ‘최고사령관’에게 요청했고, 곧바로 승낙을 받았다며 저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문 챔프가 그때처럼 고마운 적이 없었습니다. 5%면 당시 문성길의 파이트머니가 1억원이었기 때문에 500만 원의 트레이너비를 수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제가 체육관에 도착하자 김 관장은 저를 부르더니 딱 한마디를 하더군요. "내가 알아서 줄게." 그게 끝이었습니다. 김철호 관장은 총수인 심영자 회장과 최고 히트상품인 문성길의 합의사항인 트레이너 비 지급을 그렇게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저 녀석은 돈을 주지 않아도 미트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저를 트레이너가 아니라 ‘미트 잡는 기계’로 치부한 겁니다. 그리고 10차 방어가 끝날 때까지 단 한 푼의 트레이너비도 지급하지 않았고, 설렁탕 한 그릇도 얻어먹지도 못했습니다. 세계챔피언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이 고작이었죠. 한마디로 노비였습니다. 주위에서는 문성길이 경기할 때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출세했다며 전화가 오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1993년 11월 13일 문성길은 10차 방어전에서 멕시코 호세 루이스 부에노(23승 17KO 5패)에게 패하고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문 챔프의 얼굴은 탁구공이 하나 들어있는 것처럼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격려금 20만 원을 꺼내 저를 챙겨주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떠날 때는 일행 7명이 비행기로 목적지 포항에 도착했지만 돌아올 때는 저를 제외한 6명만 왕복 항공표를 끊은 것을 말입니다. 그 중심에는 역시 막강한 실권자인 김철호 관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심정은 마치 텅 빈 모래사장에 처박힌 콜라병처럼 비참함 그 자체였습니다. 헌신적으로 미트를 받으며 10차방어까지 끌고갔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버려진 헌신짝이 된 것이죠. 마치 일회용 소모품이 용도가 폐기되자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어깨통증에 시달리면서도 5년여 동안 문성길의 트레이닝에 열정을 불태우며 얼굴을 마주했지만 김 관장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저에게 가장 위안을 준 것은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삶>이란 시였습니다. 제 상황과 여건과 너무나 흡사했거든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괴로워 말라.
서러운 날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즐거운 날이 찾아올지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가버린 것은 다시금 그리워지나니...

제 월급은 1989년 당시 20만 원이었고 1993년엔 30만 원이었습니다. 훈련이 끝나면 저녁 무렵 체육관 뒷골목에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당시 우동 한 그릇은 300원, 곱빼기는 500원이었습니다.

이미지중앙

타이틀매치를 앞둔 문성길의 트레이닝 모습.


최요삼의 50만 원


1994년 신인왕전에서 최요삼(73년 전북 정읍 생, 2008년 사망)이 라이트플라이급 우승과 함께 우수신인왕에 등극했던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최요삼이 신인왕전 결승 경기(상대는 주문진체육관의 이상철)에서 6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라커룸에 들어와 "선생님 한 번만 안아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우수신인왕 상금 50만 원을 저에게 건네더군요. 봉투를 받는 순간 최요삼의 따뜻한 마음의 열기가 퍼져서인지 소리 없는 정이 온 가슴으로 흐르는 듯 했습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울컥했습니다.

최요삼의 이런 사은(師恩)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망자에게 누가 될까봐 지금껏 말을 하지 않았는데 당시 최요삼은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그 경기에서 약속된 시간에 15분 넘겨 도착했고, 저는 그를 후미진 곳으로 데려가 두들겨 팼습니다. 신인 때부터 정신무장을 확실하게 다져놓지 않으면 큰 선수가 됐을 때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요삼은 유치원생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복서였고, 자신을 바로 잡아준 스승에 대한 고마움도 알았습니다.

신인왕전이 끝나고 1994년 4월께 김철호 관장은 체육관 사정이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자 떠난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필리핀으로 날아갔습니다. 그것으로 ‘알아서 주겠다’는 트레이너 비는 지금까지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 나이 32살이었습니다.

그 후 심영자 회장은 자택인 워커힐 아파트로 저를 부르더니 전세방이라도 얻으라고 1,200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림동에 1,300만 원짜리 옥탑방을 얻어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직후 태어난 큰애가 현재 대학교 3학년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이 제 큰애는 당시 영등포에 있는 기독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원장님 성함이 김주헌이었습니다. 바로 김철호 관장의 친아버지였죠. 고향이 신의주이신데 그곳에서 대학까지 나온 당시에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습니다. 사정을 안 김 원장께서 출산비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기막힌 인연 같습니다. 김 원장은 제게 평소에도 따뜻하고 정감 있게 대해주셨던 분이었습니다.

20년 뒤의 사과

여기서 다시 서두로 돌아가죠. 얼마 전 대화할 때 저는 김철호 관장에게 “왜 그렇게 약자인 제게 트레이너 비 한 푼 주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김 관장은 바로 "영섭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공소시효도 지났으니 잊자고 하면서 웃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희 둘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습니다. 사랑했던 날들보다 미워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그런 관계 말이지요. 나이 차이야 두 살 차이였지만 상하관계 즉 갑을관계로 맺어지다 보니 저는 도마 위에 놓인 생선꼴이었고 김 관장은 칼자루를 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에 봄눈 녹듯이 응어리진 가슴이 풀어졌습니다.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김 관장도 저 못지않게 젊은 나이에 사업체를 운영하느라 가슴앓이도 많이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26년간 길고 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가슴에 훈장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성길 챔프가 “지금까지 아마와 프로를 통해서 스쳐간 트레이너 중에 영섭이 니가 최고였다”는 최고의 찬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찌 돈 몇 푼과 바꿀수 있겠습니까.

이미지중앙

88프로모션의 전성기 때 심영자 회장(가운데)과 장정구(왼쪽), 김철호.


김철호 관장은 그동안 감춰뒀던 속이야기를 제게 하나둘 꺼내놓았습니다. 사실 좀 민감한 내용인 까닭에 섣불리 물어보기도 힘들고, 대답하기도 난처한데 먼저 제가 마음의 문을 열자 김 관장도 비화를 하나씩 가감 없이 풀어놓은 겁니다. 동시에 시멘트처럼 굳어있던 제 마음도 완전히 풀어졌습니다.

김 관장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1983년 은퇴할 때 세계타이틀매치를 통해 벌은 돈이 물경 2억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1982년도 3차방어전에서 물경 4,000만 원을 받기도 했는데 당시 프로야구 최고 연봉이 2,400만 원(박철순)이었습니다. 아마 그 돈이면 웬만한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배운 도둑질이 복싱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챔피언에 등극 시켜준 심영자 회장과 함께 프로모션을 차려 일선의 뛰어들기로 했던 것입니다. 후에 심 회장도 김 관장 못지않은 많은 돈을 투자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 다 전호연(1919년생)이라는 극동 프로모션 회장을 능가하는 독보적인 프로모션을 차려 한국복싱을 지배하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다른 프로모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투자였고 프로모션에 연결된 엘리트 선수만도 50명 이상을 확보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했습니다.

또한 88체육관의 전속방송사인 KBS만으로는 선수들을 소화하기 힘들어 아란 프로모션과 모리스 프로모션을 연달아 창업하여 MBC와 SBS까지 연결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케이블방송까지 접수했으니 그야말로 ‘방송 그랜드슬램’을 만들어 문어발처럼 확장했던 독보적인 프로모션이었습니다.

그 많은 선수들을 관리 감독하고, 또 직원들 봉급까지 1980년대 초반 한달에 물경 3,000만 원씩 고정적으로 지출이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모기업의 안정적 후원이 지속됐기에 그런 대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기업이 정치권과 묘한 이해관계에서 하나둘 엇박자가 나면서 부도가 났고, 동시에 지원이 중단됐습니다.

궁여지책으로 1992년 미국의 담배회사인 ‘카멜’로부터 1년에 1억 6,000만 원이라는 후원 조건으로 프로모션 간판을 카멜로 변경하며 제2의 도약을 꿈꿨지만 그즈음에 중요한 생명줄이던 방송중계료가 시나브로 소멸되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 11월 문성길이 타이틀 방어에 실패하자 그동안 쌓였던 누적 적자가 한방에 펑하고 터지며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얘기를 하면서 김 관장은 “그러한 아픈 사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너한테만큼은 정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연민의 정이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분함과 증오 그리고 수많은 모멸감 등이 어우러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상당히 편합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김철호 관장의 재기를 응원합니다

조만간 김철호 관장은 화곡동에 체육관을 오픈한다고 합니다. 1994년 한국을 떠난 지 10년 만인 2004년에 귀국했고, 다시 11년 만에 모처럼 자기 이름을 단 체육관을 설립하는 것이죠. 잃어버린 20년을 보상받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 시작하겠다고 합니다. 한창 폭주기관차처럼 잘 나갈 때는 세상만사를 다 장악한 듯 자신만만했지만, 멈춰선 기관차를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연들이 짙게 깔려있어 좀처럼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제가 김 관장의 잃어버린 20년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심영자 회장을 찾아뵙지 못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바로 인사하겠다고 하더군요. 이유여하를 떠나 문성길에게도 잘못을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미지중앙

최근에 앙금을 풀은 필자와 김철호 관장(오른쪽).


저는 김철호 관장의 체육관 개관식 때 어느 누구보다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해서 축하해줄 생각입니다. 우리들의 슬픈 인연도 이젠 끝이 났으니까요.

산에는 소나무만 살지 않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성인군자만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이해관계나 의견충돌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토대 위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구가 탄생한 게 45억 년이라는데 인간의 수명은 고작 한 세기를 넘기기 어렵죠. 하늘 아래 살면서 인연이 닿는 사람들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삽시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