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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객은 왕’이 만들어낸 감정노동의 짙은 그늘] 사랑합니다 고객님…겉으론 웃고있지만 속으론 골병듭니다
텔레마케터·승무원·간호사…
과도한 고객요구·생떼에 신음
저임 알바생도 무시당하기 일쑤
문제생겨도 대부분 내탓
관심·배려의 문화 키워야할때


“사랑합니다, 고객님”

일면식도 없는 전화 속 상담원의 ‘사랑한다’는 말. 이 상담원은 매번 전화를 걸 때마다 모르는 사람과 맞닥뜨리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절하게 응대해야 한다는 서비스업계의 원칙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감정노동’을 하는 중이다.

손님을 왕처럼 떠받드는 우리나라 서비스업계 특유의 문화는 노동자들을 감정노동에 신음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전직 모 은행 텔러로 5년간 근무한 이모(33ㆍ여)씨는 “주어진 절차 등을 무시하고 친분이 있으니 편법으로 처리해달라는 요구가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신분증이 필요한 절차에서도 당장 해달라고 떼를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해줬다가 고객이 뒤늦게 찾아와 “내가 말한 건 이게 아니다”며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씨는 “인상을 구기지 않고 응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났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일하는 A(23ㆍ여)씨는 “급한 약속이 있다며 풀 메이크업 받고, 제품을 사간 다음 며칠 뒤에 환불하러 오는 손님도 적지 않다”고 했다.

또 샘플 하나에 소리를 지르는 고객, 제품을 거의 다 쓰고 가져와서는 “명품이면 명품답게 처리하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A씨는 “그런 일을 겪을 때면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가 없다. 나쁜 감정을 숨기고 얼굴에는 미소를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통신사 콜센터 상담사 B(36)씨도 얼굴도 모르는 고객에게 시달리는 일이 잘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어떤 요구가 아닌 그냥 불만 전화를 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그러면 죄송하다고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는데, 이번엔 전화를 끊었다고 3시간 넘게 실랑이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 휴대폰 업체 상담원 역시 “계속 상급자와의 면담을 요구해 하루 종일 몇 명의 직원이 한 고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도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노동자이긴 마찬가지다.

경기 지역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박모(37ㆍ여)씨는 “새벽 응급실에서 일하면 술취한 사람이 밀치거나 삿대질하는 경우도 하루에 한 번은 겪게 된다”고 했다. 그럴 때면 뒤돌아 혼잣말을 하고 삭힌다. 병원 보안 요원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 위협이 있어야 개입을 하지 은근히 시비를 거는 경우에는 간호사가 다 감당해야 한다.

물리치료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맨살에 마사지를 하고 기기를 몸에 부착을 할 때 빤히 쳐다보면서 이상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다”며 “그럴 때도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텔레마케터, 승무원, 간호사 등이 아니더라도, 서비스업에 시간제로 종사하는 아르바이트생도 강도 높은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오히려 짠 시급과 열악한 근무환경, 불안정한 고용조건 등에 비해 과다한 서비스정신을 요구받아 이들의 시름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장모(30)씨는 “손님이 이상한 걸로 트집을 잡더라도 항상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 했고 굴욕적인 일들을 감수하고 일할 수밖에 없다”며 ““꼴랑 최저임금을 주면서 알바생에게 엄청난 서비스 정신을 바란다는 게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이처럼 각계에서 감정노동 스트레스를 호소하지만, 대부분 업체는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불쾌한 언행 등에 대한 대응을 직원에게 전적으로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또 관련 규제를 마련해 직원을 보호하자는 요구에도 대체로 미온적이다.

지난 12일 KB국민카드는 콜센터 상담 직원에게 욕설을 퍼붓고 성적 모욕감을 준 회원 D씨를 서울 종로경찰서에 형사고발했다. 하지만 이처럼 기업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사례는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손님을 왕처럼 받드는 한국 서비스업계 문화가 감정노동자들의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박상현 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고객만족’이라는 문화가 만들어 낸 그늘이 바로 감정노동이다”라며 “웃는 낯으로 고객을 대해야만 하는 이들을 위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지웅ㆍ이세진 기자/plat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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