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연결되는 사람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게 나에게는 신기하다. 50대 후반인 내가 아날로그 친구의 경험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페이스북 친구를 ‘페친’이라고 한다. 친구를 요청하고 상대가 수락하면 서로 ‘친구’가 된다. 친구가 몇 명인지도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다.
왜 ‘친구’라고 했을까? 내가 아는 친구는 이런 게 아닌데.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한 생각 차이로 페이스북 ‘친구’ 관계를 끊었다는 것도 아날로그 친구때와는 다른 것 같다. 아날로그 친구와 신자유주의 시대 SNS 상의 친구는 어떻게 다른가. 굳이 ‘친구’라는 단어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인가?
과거 카드회사가 크레디트 카드를 쓰지 않으면 신용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개인이 될 것처럼 마케팅해 사람마다 신용카드를 쓰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크레디트 카드란 믿을 수 있는 카드라기 보다는 ‘빚 카드’이지 않은가. 신용(credit)은 빚(debt)의 다른 표현이다.
페이스북의 ‘친구’라는 단어에서 크레디트 카드라는 명칭이 연상되는 건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재해석해야할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에서 ‘친구’를 만들어 소통하지 않으면 마치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다. 이 때문에 신용카드뿐 아니라 페이스북을 이용할 때도 잘 해야 한다.
인터넷, 모바일은 적응해야 할 문명의 이기다. ‘접속’으로만 유지 되면 황폐해질 수 있는 관계이지만, 인간적인 ‘접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나치게 SNS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문제다. 젊은 세대가 바쁜 것도 인터넷에 시간을 저당잡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검색하고 저장하기에 바쁘다. 그래서 멍 때릴 시간조차 없다. 창의력은 지성보다는 노는 것, 긴장보다는 이완에서 나온다. 페이스북 ‘친구’들과도 그렇게 소통해야겠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