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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58. 페리토모레노, 빙하를 넣은 위스키의 찌릿함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파타고니아 지역에 와서는 매일 매일이 아름다운 풍경의 잔칫날이다. 오늘은 빙하를 보러 간다.

빙하라니, 그것은 북극이나 남극, 극지방을 연상시킨다. “빙하”라는 단어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낯선 단어다. 극지방을 경험할 일이 없는 한국 사람인 나에게 빙하란 “아기공룡둘리의 고향”일 만큼 비현실적인 단어다. 그래서 오늘 모레노 빙하투어가 기다려진다. 우수아이아나 또레스 델 파이네 등에서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봉우리들과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강물, 호수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빙하는 낯설다.


로스 글리시아레스 국립공원(Parque National Los Glasiares)은 빙하가 모여있는 곳이라 당연하게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도 선정되었다. 이곳의 빙하로 미니트레킹(Minitreking) 투어를 할 예정이다. 투어버스 안에서 보이는 경치가 벌써 예사롭지 않다. 산과 눈, 눈과 구름, 구름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하다. 산아래 강물위로 쌓여있는 빙하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저 너머 아름다운 설경에는 동화같은 “눈의 나라”가 있을 것만 같다.

버스에서 내려 배로 갈아탄다. 50여개의 크고 작은 빙하 중 페리토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로 가는 길이다. 파타고니아의 빙하의 양이 남극과 그린란드 다음이라고 하니 이곳 빙하를 보러가는 의미가 더 커진다. 


배가 빙하로 근접한다. 호수위에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떠 있는 것 같다. 산과 빙하와 강물이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다. 산은 그림처럼 배경을 차지하고 빙하는 막 퍼담은 아이스크림처럼 보이는데다 강물만이 현실적으로 비춰져서 지금 보는 이 장면이 과연 현실인지 아닌지 몽롱해진다.

배에서 내린다. 장갑을 끼고 아이젠을 신은 탐험자 조각상이 반겨준다. 이제 스페인어는 대강 눈치로 이해하고 다닌다. “페리토모레노 빙하에 어서 오세요!” 뭐 이정도 같다. 하하.


빙하 가이드라 해서 남자들일 줄 알았는데 기다리고 있는 우리 팀의 가이드는 예쁜 아가씨들이어서 괜히 놀랍다. 하긴 남자만 빙하 투어 가이드 하란 법도 없는데 막연한 선입견이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팀의 가이드는 남자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일단 빙하 가까이로 걸어간다.

거대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이 빙하는 하루에 40cm씩 호수 쪽으로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빙하에 오르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줄을 서서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이다. 개인이 착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젠을 끼워주는 사람들 앞에 세 줄로 서면 발에 잘 고정되도록 꼼꼼하게 아이젠을 감아준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나니 땅 위에선 제대로 서는 것도 허둥대게 된다. 보행 방법이 다른 세계로의 진입준비를 한 셈이다. 빙하로 고고!!

친절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빙하에 오를 채비를 한다. 가이드 말로는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럭키가이들이라며, 다른 날은 흐리거나 바람이 불었는데 오늘은 화창하고 바람도 많지 않아 날씨가 좋다고 한다. 파타고니아에 들어온 이래 연일 날씨가 좋다. 크게 보면 남미에서의 날씨운이 계속 좋다. 


수 천년동안 눈이 내리고 쌓이기를 반복해서 얻어진 빙하를 아이젠을 칭칭 감고 걷는다. 아이젠은 두툼하고 제법 무거워서 미끄러짐을 방지하면서 이 얼음산을 걷게 한다. 줄을 서서 가이드를 따라가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남극의 펭귄 떼들이 나들이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펭귄들이 왜 그리 뒤뚱거리며 걷게 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얼음이라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가 아닐까?

빙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크레바스도 많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이나 틈들이 겁많은 내겐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미약하지만 물이 졸졸 흐르는 곳도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미끄러져 신발이 젖는다. 가이드도 놀라 계속 조심시키며 빙하 위를 걷게 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여행이 끝난 다음 기회가 생기면, “빙하를 걸어본 일이 있니? 얼음산을 등반해 본 일은?” 하고 한번쯤 잘난 체 하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일어나는, 그렇게 멋진 풍경들이 이어진다.

빙하나 구름이 물이라는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하늘과 구름과 빙하의 풍경 속에 보이는 산이 이질적으로 보인다. 자연이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산 인줄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는 산은 내가 본 것 중에서는 가장 부자연스런 모습이다.

빙하 위에서 바라보니 앞에 보이는 산이나 여기 빙하 중 어느 것이 더 큰지 모를 지경이다. 지구표면의 10%가 빙하라는 말이 맞긴 한 것 같다. 대체 내가 알던 지구는 무엇이었나 싶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막힌 풍경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은 인간이다.

손은 시리지만 장갑을 벗어 푸른빛 빙하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빙하의 시린 물을 만져보기도 한다. 


빙하 트레킹의 피날레는 위스키 온 더 락 한잔으로 마무리한다. 가이드는 추위와 긴장으로 오그라든 사람들에게 빙하의 얼음을 넣은 위스키를 한잔 씩 따라 준다. 여행자들에게서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함께 투어를 하던 여행자들과 웃으며 건배를 한다.

위스키 한 잔과 비스킷 한 개가 빙하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한다. 빙하가 둥둥 떠있는 위스키 한 모금을 삼킨다. 목구멍에서 식도를 지나 위속까지 찌릿찌릿 순서대로 뜨거워진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빙하는 이제 내 몸속에도 흘러 들어갔다. 앞으로 어디에서 위스키 온 더 락을 마시게 되더라도 이 방하의 맛을 추억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빙하트레킹을 마치고 배를 기다리며 준비해 온 점심 도시락을 꺼낸다. 멋진 투어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이곳은 특히 비싸기도 해서 햇볕 좋은 쉼터에 앉아 어제 사 놓은 보카디요를 먹는다. 위스키를 마셔서인지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도시락은 별로 맛이 없다. 생수로 입을 헹구고는 본격적으로 빙하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가기 위해 배를 기다린다.

멀리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의 빙하들을 걸어 다니며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망대로 간다. 거대한 철제 구조물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한참씩 걸어다니며 빙하를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산에서부터 흘러나와 쌓인 빙하는 마치 얼어붙은 파도처럼 보인다. 


아침에 트레킹했던 귀여운(?)빙하에 비하면 이 정도 스케일의 빙하는 경외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곳엔 절대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장엄한 빙하의 고원이다.

여기저기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난간에 기대 서 있는데, 눈앞에서 빙하가 무너진다. 이 천둥소리는 빙하의 일부분이 녹아 무너지는 소리다. 눈 앞의 빙하는 굉음을 내며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빙하 아래로 거대한 물보라가 퍼진다. 빙하는 미세하게 움직이는 상태라 방향을 바꾸면서 붕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낯설었던 빙하는 온종일 눈앞에서, 발밑에서, 손끝의 촉감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 긴 세월동안 형성된 빙하가 단시간에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탄식을 한다. 난간에 기대어 퍼져나가는 물보라를 한참동안 응시한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삶, 저렇게 뚝 떨어져 나가는 빙하처럼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손을 놓을 수 있을까? 우수아이아에서 생각하던 “끝”이라는 단어가 뜬금없이 여기서 수면위로 떠오른다.

빙하의 세계는 춥지만 달콤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한 어딘가에 혹시 아기공룡둘리의 엄마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남겨두었다. 혹은 저 빙산의 고원 어딘가에 깐따삐야 별로 가는 비행장소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오늘 본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니 하는 말이다.

새하얀 눈의 나라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빙하의 나라는 파란 나라였다. 일생의 하루만 정해진 색으로 따로 보관을 할 수 있다면 오늘은 파란 날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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