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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ADERS CAFE] 한국, 기업도 교육도 창조적 축적 필요하다
서울공대 석학 26명 산업위기 진단
한국, 기술 모방에 안주 성장모델 한계
선진국은 오랜시간 고급 경험지식 쌓아
기업 수직계열화 의존 20세기형 모델 타파
대학은 창의적 교육 강화하는게 해법


# 10여 년 전, 한국의 반도체 기술 전공 교수가 세계 최초로 핀펫(FinFET)이라는 3차원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준비한 후, 국내 반도체 회사를 찾았다. 유리한 조건으로 기술을 제휴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 회사 기술 책임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반도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그 3차원 반도체 소자 기술은 미국회사가 먼저 실시권을 이전받아 2011년부터 양산을 시작했고 현재 그 기술은 비메모리 반도체의 표준 기술이 돼 인텔, 삼성 등에서 양산에 적용되고 있다. 


# 한국 최초의 자립기술로 건설된 장대교로 평가되는 인천대교. 그러나 초기 프로젝트 전체의 기획과 핵심구조를 설계하는 개념설계는 일본과 캐나다, 영국 등의 투자 및 기술회사 등의 도움을 받아 진행됐다. 태풍과 지진, 해류 등 안정성 확보에 대한 경험지식과 데이터베이스가 없기 때문이다. 총 공사비가 2조원이 넘는 공사에서 개념설계 부분은 예산의 10~15%를 차지할 정도로 표준기술에 비해 훨씬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이다. 위의 두 사례는 추격과 모방 중심에 안주하고 신기술을 받아들이거나 개발하는데 소극적인 한국산업의 현 주소를 보여준다.

성장동력 정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가운데 서울공대 26명의 석학이 한국 산업의 위기를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책, ‘축적의 시간’(지식노마드)을 펴냈다. 산업체와 긴밀하게 협력해온 교수들이 내놓은 우리 산업 위기의 진단과 해법이다. 교수들이 외부의 재정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Made in Korea’의 도전과 과제를 정리한 것으로 각 분야의 이론과 현장을 모두 아는 교수들이 멘토로 참여했다.

“이미 세계 유수의 대학들 사이에는 그처럼 글로벌하게 협력해서 가르치고, 오픈 커리큘럼을 만들고 서로 학생들을 파견해서 바꾸어 가르치는 등의 활동을 하는 것이 표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세계 트렌드와 혁신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오픈 플랫폼’입니다.” ‘ (변화와 도전을 반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혁신이 꽃핀다!’에서)

2년간 진행된 프로젝트의 진단과 처방은 ‘축적’이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이들이 내놓은 우리 산업의 경쟁력 위기의 원인은 그동안 지적돼온 대로 고부가가치 핵심기술,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로 귀결된다.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이란 제품이나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서 당면 문제의 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역량이다. 이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지식과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를 전제로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축적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동안 이런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이같은 성장 모델이 한계에 도달한 게 우리의 당면 현실이라고 저자들은 진단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념설계 역량을 확보할 수 있을까.

선진국들은 오랜 산업의 역사를 통해 고급 경험지식을 축적해왔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진국처럼 100년 이상을 기다리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중국의 경우에는 시간의 한계를 공간의 이점으로 극복해 개념설계 역량을 빠르게 축적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즉 산업선진국들이 100년에 걸쳐 경험하게 될 개념설계의 사례들을 중국은 10년만에 10배 많은 수의 사례를 접하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다. 이런 경험 축적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따라 특정 기관이나 기업에 경험을 집중시켜 축적하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중국의 해상플랜트나 자동차 산업, 가전, 휴대폰 등 거의 전 산업 영역에서 세계 최초 모델이 나오고 있는 건 그런 축적의 시간적 한계를 공간의 힘으로 극복했다는 증거다. 앞으로 중국에서 개념설계를 받아와 생산해 중국에 납품해야 하는 상황도 제기된다.

100년이란 시간도, 중국처럼 거대한 내수시장이란 공간도 없는 한국은 어떤 전략이 가능할까.

저자들은 우리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어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으로 축적해나가는 체제를 갖추어나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우리 사회 전반의 인센티브 체계, 문화를 바꾸어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주체가 축적을 지향하도록 바꾸는 것이다.

가령 기업은 수직계열화 체제에 의존하는 20세기형 경영모델을 시급히 바꾸어야 한다. 또 대학은 새로운 개념을 도전적으로 제시해보도록 자극하고 직접 만들어 보고 자유롭게 실패해보도록 격려하면서 기초개념이 강한 창의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 정책은 개념설계급 패러다임 도전이 가능하도록 톱다운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조언이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도 제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창조적 축적을 위한 열린 자세와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새롭고 도전적인 개념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실패를 용인하며 이런 경험을 축적하고자 노력하는 조직과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적 인센티브 체계 전반을 개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추격 경제 시기에 우리 산업계와 정책 의사결정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공 방정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동원하고 항상 정해진 목표를 조기에 초과 달성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시행착오의 과정과 결과를 꼼꼼이 쌓아가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저자들은 “축적의 범위를 산업의 경계 바깥으로 넓힘으로써 선진국의 시간과 중국의 규모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만의 고유한 축적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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