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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ADERS CAFE] 허기를 달래주는 위로의 맛…글쟁이들의 밥상
밥 한그릇에 얽힌 추억과 사연을 담아낸
최일남·공선옥 등 12명 인사들의 산문집
박완서 ‘메밀칼싹두기’ 성석제 ‘묵밥’ 등
고향의 맛·엄마의 맛을 맛깔스럽게 표현


한국인에게 밥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안부를 묻는 첫마디 “식사하셨습니까”로 시작하는 인사는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이어진다. 도리를 못하고 제 몫을 못하는 이를 비난할 때도 밥은 비유적으로 쓰였다. 먹고 사는 일에서 밥은 그 중심에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어찌보면 더 집요해진 측면이 있다. TV채널마다 요리 프로그램이 온종일 이어지는 모습이 그렇다. 속이 허하다고 해야 할까. 허기를 달래주는 위로의 맛, 어머니의 밥상을 떠올리게 하는 산문집이 나와 눈길을 끈다.

밥 한그릇에 얽힌 사연을 맛깔스럽게 담아낸 산문집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한길사)에는 소설가 박완서, 최일남, 성석제, 신경숙, 공선옥, 김진애, 주철환, 장용규 등 12명의 글이 담겨있다. 여기에 요리하는 작가 박찬일도 글을 보탰다. 글쟁이들의 ‘쿡방’인 셈이다.

개성음식의 깔끔한 맛을 늘 자랑처럼 얘기해온 소설가 박완서는 이름도 생소한 ‘메밀칼싹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상에 오르던 메밀칼싹두기. 그가 들려주는 요리법은 꽤나 싱겁다. 집에서 맷돌에 갈아 체로 친 메밀가루를 적당히 반죽해 다듬이 방망이로 안반에다 밀어 칼로 썩둑썩둑 썬다. 이를 맹물에 삶아 약간 걸쭉해진 그 국물과 함께 한 대접씩 퍼담아 내는 게 끝이다. 따로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않고 꾸미를 얹지도 않는다. 

“밥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홉 살 겨울에 우리 집에 쌀이 떨어졌다. 진짜로 쌀독에 쌀이 하나도 없어서 빈 독을 열어보면 서늘한 기운이 확 얼굴로 끼쳐왔다. 그것은 정말이다. 쌀이 그득한 쌀독에서는 훈김이 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절망과 희망의 기운이다.”(공선옥의‘ 밥으로 가는 먼 길’에서)

할아버지 대접에도 색다른 게 올라가지 않는다. 머슴이나 집안의 어른이나 평등한 음식이 메밀칼싹두기였다. 대청마루에 앉아 비오는 걸 바라보며 한없이 청승스러워지던 마음은 “땀 흘려 그걸 한 그릇씩 먹고 나면 뱃속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면서 좀전의 고적감은 눈독듯이 사라지고 이렇게 화목한 집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고 작가는 말한다.

소설가 신경숙은 팥죽과 어머니 이야기를 털어놨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겨울날이면 부엌의 가장 큰 솥을 꺼내 한나절 내내 팥죽을 삶았다. 체에 걸러 팥물을 내고 흰 새알심을 만들어 팥죽을 쑤어 온가족의 입을 즐겁게 해주신 것이다. 남은 팥죽을 들통에 담아 뒤란에 내놓으면 심심한 겨울 한동안 맛난 간식이 됐다. 들통에 담긴 팥죽이 꽁꽁 얼면 그걸 방안에 들여놓고, 방안의 훈김으로 팥죽이 녹으면 흰 사기대접에 퍼담고 아끼는 뉴슈가를 뿌려주시기도 했다.

“눈이 폭폭 쌓일 때 아랫목에 발을 뻗고 앉아 문종이에 비치는 눈그림자를 보며 얼었다가 녹은 찹쌀 새알심을 깨물어먹는 것. 그 싸함과 쫀득쪽득함을 뭐라 해야 할는지. 그 팥물의 차가운 달콤함을” 작가는 잊지 못한다.

입맛 까다로운 소설가 성석제의 원조 묵밥 이야기는 특유의 농담체에 담겨 입안이 즐거워진다. 지인의 안내로 찾아간 충청도인지 경기도인지 경계가 모호했던 시골 야산 아래 허름한 식당. 식구끼리 먹는 방에 앉아 음식을 기다린 그에게 차려나온 밥상은 달랑 묵밥 두 그릇과 배추 김치. 단출한 밥상이지만 묵밥은 보기와 달랐다. 양념간장을 듬뿍 넣고 잘 저은 다음 묵밥을 입에 넣은 순간,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맛이었다. 육수에서는 윤기가 돌아 허한 느낌을 줄여주었고 고추 덕분에 매콤했다. 묵은 이와 싸울 생각이 없는 듯 사락사락 입 속에서 녹다가 목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고 작가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는 바나나에 담긴 애틋한 사연을 털어놨다.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가게를 운영하는 고모와 함께 살던 초등학교 시절, 한 부잣집 아주머니가 그를 무척 귀여워해 아들로 삼으려 했다는 얘기다. 하루는 아주머니가 소년을 집에 데리고 갔다. 으리으리한 양옥집 거실에서 부인이 가져온 사이다를 마시고 저녁시간이 돼 돌아가려는데 부인이 밥을 먹고 가라고 권했다.

소년은 집에 가서 먹어야 한다고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부인이 선반에서 노란 과일을 하나 꺼내 줬다. 바나나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 입에 넣은 바나나는 살살 녹았다. 처음 먹어 본 바나나였다. 고모에게 남은 껍질을 자랑처럼 내밀었더니 고모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해 가을 소풍 가는 날 소년의 가방 속에는 바나나와 사이다 새알초콜릿이 들어있었다.

박찬일의 요리 이야기 역시 어머니로 돌아간다. 요리사가 된 것도, 요리의 스승도 어머니라고 그는 단언한다. 계란 한 판으로 선생님 도시락 풀코스를 짠 이야기는 그 중 백미. 담임선생 도시락 당번을 맡게 되자 한푼 장 볼 돈이 없었던 어머니는 방문판매하는 장사에게서 계란 한 판을 외상으로 얻어 그걸로 부치고 지지고 쪄서 화려한 삼단찬합을 완성한 것. 고명 없이 오로지 멸치육수만으로 만든 국수이야기는 가난했던 시절의 음식이지만 지금은 되레 재료 본연의 맛의 즐거움을 주는 순하고 따뜻한 음식으로 기억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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