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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락의 U턴] '편도족'의 일상... 가난해서 도시락, 외로워서 도시락
-우리시대 편도족(편의점 도시락족)의 일상
-편리함 불구 “각박한 세상 상징한다” 의견도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지난 16일 점심 시간이라기에는 다소 늦은 오후 2시 고려대학교 캠퍼스 내 한 편의점. 늦깎이 취업준비생 김모(30) 씨는 입식 테이블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분주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오늘 학식(학교 구내식당) 메뉴가 마음에 안들어서요”라고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시락과 청년, 도시락과 쓸쓸한 귀가…> 30대 청년이 저녁때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청년 손에 들려진 도시락이 묘한 여운을 전달해준다.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학교 점심 시간(정오~오후 2시)에는 주변 식당 어디나 학생들이 몰리는 통에 이를 피하느라 자연스레 늦은 점심이 일상이 됐다는 그는 최근 편의점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이 잦아졌다. 취업이 늦어져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학교를 떠나고 고향 부모님께 더 이상 손을 벌릴 수 없어 지갑 사정도 빠듯해진 와중에 주변 시선 신경 안쓰고 싼 값에 먹을거리를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편의점을 찾게 됐다. “이 시간 여기에 오면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눈빛만 스쳐도 알 수 있죠. ‘너도 혼자구나…’”

김 씨는 이른바 ‘편도족(편의점 도시락족)’이다. 최근 편의점 도시락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자 이를 일컫는 신조어다. 그러나 김 씨에게는 이외에도 몇 개의 신조어가 더 따라다닌다. 그는 재학시절 학교 내에서는 학우들과 잘 어울려다니지 않는 ‘아싸(아웃사이더)’였고, 지금은 삼시세끼 대부분을 혼자 해결하는 ‘혼밥족’이자, 취업이 늦어져 연애ㆍ결혼ㆍ출산 및 기타 등등을 포기한 ‘N포세대’다. 그런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은 그는 “그러니까 도시락이죠”라고 결론 짓는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도시락, 돈이 없어서 도시락, 시간이 없어서 도시락….

한해 규모가 2조5000억원에 이른다는 도시락 산업은 이처럼 ‘없는 사람들’로부터 양분을 빨아들여 자라 온 시장이다. 외식ㆍ유통업계가 수년째 불황의 그늘 밑에서 성장이 지체되고 있는 사이, 도시락 산업은 매년 수십 퍼센트씩 몸집을 키웠다. 메르스로 산업 전반이 흔들렸을 때, 각 증권사들이 유독 편의점 업계에 대해서 긍정적 전망을 담은 리포트를 내놓았던 것도 도시락의 저력을 믿은 덕분이었다.

업계에서는 도시락 산업이 급격히 팽창한 시점을 2008년 금융위기로 꼽는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출발한 당시의 금융위기로 많은 직장인들이 집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수요를 간파한 업계에서 경쟁적으로 제품을 출시하며 시장을 공략했다는 것이다. 실제 편의점 3사(CUㆍGS25ㆍ세븐일레븐)의 도시락 매출은 2010년대 들어 매년 40~50%씩 성장했다. 1993년 일찌감치 도시락 시장에 진출했던 한솥을 제외하면, 본도시락, 오봉도시락, 토마토도시락 등 100개가 넘는 매장을 갖고 있는 도시락 프랜차이즈가 사업의 첫 발을 뗀 때 역시 모두 2010년이다. GS25 관계자는 “삼각김밥이 2002년 월드컵을 겪고 나서 일반인들 사이에 자리잡았다면, 도시락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싸게 점심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했다.

최근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직장인 임모(36) 씨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도시락을 즐겨 찾는 사례다. 그는 대학 시절이었던 2000년대 중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찌감치 도시락에 눈을 떴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 새벽 4시쯤에 유통기한이 다 된 음식들을 매대에서 치우거든요. 이걸 ‘폐기’라고 하는데 그 때는 도시락이 하루에 한 두개밖에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팔리지 않아서 대부분 그냥 버렸어요. 그게 아까워서 집으로 싸가서 아침으로 먹었죠.”

당시 물리도록 먹었던 터라 한동안은 편의점 도시락이나 삼각김밥은 쳐다도 안봤지만, 그는 결혼 준비를 하며 다시 편도족 대열에 합류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살림살이며 혼수, 예물을 장만하다 보니까 돈에 대한 개념이 사라지는 거에요. 몇 만원은 돈 같지도 않게 느껴지는데, 정신을 퍼뜩 차리고 보니까 뻔한 월급 사정 때문에 위기 의식이 드는 거에요.” 그는 ‘티끌이라도 모으자’는 심정으로 올초 줄였던 담배를 완전히 끊고, 특별한 약속이 없을 경우 점심을 편의점 도시락으로 사먹기 시작했다.

실제 직장인들 가운데는 임 씨처럼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세븐일레븐은 지난해 일반 식당처럼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을 갖춘 KT강남점을 오픈했는데, 이 점포의 도시락을 포함한 즉석식품 판매 비중은 26.2%로, 일반 점포의 5%에 비해 5배 이상 높다. 업체 관계자는 “주변에 회사가 많아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 대에 많이 찾은 것이 도시락 매출 비중 상승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임 씨와는 달리 시간이 없어서 도시락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택배 기사 김모(41) 씨의 점심은 대체로 편의점 도시락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배달하는 건수에 따라 받는 돈도 달라지기 때문에 시간이 곧 돈이에요. 식당에 자리잡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차에서 도시락을 먹죠.” 몸 쓰는 일이라 예전에는 든든하게 챙겨먹었지만, 일이 손에 익고 나니 빨리 마무리하고 저녁을 편하게 먹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도시락 종류도 다양해져 한 끼 대용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실제 도시락 업계는 다양한 소비자 수요를 사로잡기 위해 최근의 외식 트렌드를 꾸준히 수용하며 변모를 꾀해왔다. ‘집밥’을 콘셉트로 집에서 식사를 할 때보다 다양한 반찬을 담는 것은 물론이고, 올 여름에는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을 위해 장어나 오리 등을 담은 ‘보양’ 제품도 내놨다. 밥소믈리에까지 두고 밥맛을 연구하는 업체도 있을 정도다. ‘허울만 집밥’, ‘가짜 웰빙’이라는 냉소도 있지만, 값비싼 트렌드를 대중이 소비 가능한 형태로 선보였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 하다.

GS25 관계자는 “과거 도시락은 편의점에서 한 끼 급하게 때우는 싼 먹거리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에 고품질 상품을 개발하기 어려웠다”며 “2010년 이후의 도시락은 다양한 맛과 높은 품질을 앞세운 하나의 음식으로 출시되기 시작했으며, 고객들은 가격 대비 맛과 양, 품질이 좋다는 평가와 함께 지속적인 재구매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도시락 산업이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시락 시장이 발달한 일본의 사례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국ㆍ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점심을 간편하게 해결하려는 젊은 도시 직장인들 사이에서 ‘스내킹(snacking)’이란 이름의 비슷한 문화가 몇년전부터 나타나고 있다”며 “소비하는 제품이 국가마다 다를 뿐 세계적인 트렌드다”고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도시락 문화가 발달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질병들이 표출해 낸 하나의 증상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허경옥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도시락 소비가 특히 도시의 젊은층 사이에서 많은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불황, 높은 청년 실업률, 그로 인한 싱글족 증가, OECD 국가 중 최장 근로시간과 최단 수면시간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로 직격탄을 입고 있는 것이 도시 젊은층인데, 그로 인해 나타난 소비 행태가 도시락”이라며 “도시락이 집밥이자 보양식이 된 것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해졌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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