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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민낯 - 승정원일기29] 君臣은 父子와 같다…‘탕평’ 적극 펼치는 영조
무신란(戊申亂)은 영조 4년(1728) 3월 15일에 소론 과격파와 남인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주동자 이인좌와 정희량, 박필현 등은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주장하고, 경종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진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 놓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또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이탄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인좌는 3월 15일 청주를 함락시키고 경기도 안성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도순무사 오명항이 3월 24일 안성의 청룡산에서 반군을 물리치고 이인좌 등을 체포하였다. 이어 영남 등지에서 잔당을 토벌하고, 4월 19일에 개선하였다. 영조는 무신란 진압에 공을 세운 사람 15명을 분무 공신으로 책정하였다.

영조는 4월 22일 비망기를 내렸는데, 먼저 자신이 덕이 없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반성을 하고 무신란은 당쟁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아비와 자식의 관계와 같다고 하면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에서 지은 시를 낭송하였다. 이는 더 이상 당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영조는 이 비망기를 대제학 윤순에게 언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선포하라고 명하였다.

무신란은 정국에 변화를 가져왔다. 영조 편에 섰던 남인 오광운 등은 무신란에 관련된 남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자구책 마련에 부심하였고, 소론은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주동자가 소론 과격파여서 명분상 불리한 처지가 되어 세력이 약해졌다. 반면에 노론은 소론 역적의 토벌을 주장하였던 명분이 정당성을 인정받아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당쟁으로 왕권의 존립마저 위태롭다는 사실에 영조는 탕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나아가 탕평파가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정책 결정이나 정국 운영을 둘러싸고 여야간에, 또는 같은 당에서도 의견을 달리하여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300년 전의 ‘탕평’이란 화두가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대걸(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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