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사랑에 빠진 오기사, 글로 그림으로 ‘건축학개론’ 다시 쓰다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만약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집을 선물받는다고 상상해보자. 강남의 비싼 주상복합 아파트를 떠올릴수도 있고, 담벼락 높은 평창동 어느 저택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조금 더 로맨틱한 여자라면,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서연에게 지어준 제주도 집을 떠올릴 확률이 높다. 접이식 통유리 바깥으로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잔디가 마당에서부터 지붕까지 이어지는, 영원히 변치 않을 첫사랑의 품 같은 집 말이다.

한 건축가가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유명 여배우다. 1년 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아직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다. 그녀를 떠올릴 때면 얼굴은 상기되고 입가엔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승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그녀에게 그런 낭만적인 집을 지어주겠거니 했다. 그래서 물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어떤 집을 지어주고 싶느냐고. 

“어떤 집인가라기보다 어떤 땅인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땅에 어울리는 집을 지어야 하니까요. 저는 도로가 4차로 이하로 난 곳, 걷기 좋은 동네에 집을 지어주고 싶습니다.”
[사진제공=진화랑]
[사진제공=진화랑]
[사진제공=진화랑]
[사진제공=진화랑]

지난해 5월, 건축가 오영욱(39)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엄지원과의 결혼 때문이다. 톱 여배우와 결혼한 일반인 남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그는 이미 수년전부터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이름을 날린 여행작가다. 첫 책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2005)’에 이어 두번째로 낸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2006)’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지금은 서점가에 흔한 게 여행 책이지만, 감성적인 글과 그림, 사진으로 채운 여행 책은 실은 아나운서에서 여행작가로 전업한 손미나 씨보다 오기사가 먼저 시도했다. 그로부터 오기사는 10년간 7권의 책을 내놨다.

건축가 오영욱이 아닌 여행작가 오기사가 9월 4일부터 10월 3일까지 진화랑(서울 종로구 통의동)에서 개인전을 연다. 타이틀은 ‘작은 눈으로 바라본 세상’. 형식은 건축전이지만, 전시 공간은 한 권의 여행 책을 펼쳐놓은 것처럼 잔잔하다. 

작가가 대륙을 횡단하며 기록한 일러스트와 여행 스케치 50점, 가로 3m에 달하는 인생지도 그림 원본, 부산도시 그림 10점, 서울 녹지축 그림 및 판화 10점, 그리고 건축모형, 도면집 등이 전시장을 채웠다. 빨간색 안전모를 쓴 오기사, 건축에 뿌리를 둔 여행작가 오기사의 아바타 같은 오기사 캐릭터 피규어 150점도 나와 있다.

여행작가 오기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건축가 오영욱이다. 여행을 떠나게 된 동기도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건축을 잘 하고 싶어서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다니게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학생 때부터 늘 2인자였어요. 공부도 그림도 다 잘 하는 친구를 부러워했죠. 그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오기사’ 오영욱. [사진=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스스로 건축가로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방황했다. 대학 졸업 후 대림산업에서 3년 넘게 일했지만 곧 그만뒀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다. 1년 반동안 15개국을 돌았다. 거기서 배우고 싶은 건축물들을 스케치했다. 마음을 굳혔다. “나만의 방식으로 건축을 해 보자.” 그는 글과 그림으로 건축에 대해 소통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현실적인’ 계기도 있었다. 건축계 현실에서 벽을 느낀 것이다.

“제가 건축이 하고 싶었던 건 두가지 이유에서였어요. 하나는 예술적인 이유였는데, 콘크리트로 지어진 프랑스 어느 수도원을 보고 눈물을 흘릴 뻔한 적이 있었어요. 예술적인 감동을 건축에서 느낀거죠.”

두번째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이상과 괴리된 현실은 결국 건축가가 아닌 여행작가로 변심(?)하게 만들었다.

“제가 건축을 배울 땐 좋은 건축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요즘 같으면 망상주의자라고 놀림 받겠지만요. 그런데 건축주 개개인의 욕망의 집적물인 오늘날의 건축에서 더 이상 이러한 로망을 실현하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의 말에 따르면 건축가 오영욱의 공모전 낙선율은 90%다. 그는 매번 떨어졌다. 800팀이 응모한 공모전에서 800등을 한 적도 있다. 전시장에 걸린 스케치에 얽힌 사연 하나.

“넓은 숲에 있는 핀란드의 어느 미술관을 증축하는 공모전이었어요. 건물 앞에 80년 된 영국식 정원이 있었는데, 나무를 자르느니 정원 지하를 파서 건물을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심사위원이 그러더라고요. 80년 된 문화유산을 (감히) 건드린 팀이 있었는데 그 팀은 심사에서 제외했다고요.”

어찌보면 건축가로서 그의 여정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번 전시의 부제로 생각한 것이 ‘실패의 기록’일 정도다.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에겐 건축사 자격증이 없다. 앞으로 자격증을 딸 생각도 없다. 예정된 2~3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건축가로서의 직함은 ‘일단락’ 지을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뿌리는 건축이다. 또한 모든 것은 실패로부터 진화한다고 생각한다. 벽돌 하나 하나를 손으로 쌓아 올리듯, 타고난 능력보다 꾸준한 성실함으로 자신만의 ‘건축학개론’을 다시 쓰는 중이다. 섬세한 스케치와 드로잉, 진심어린 글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은 뭘까. “어떤 건축도 정답은 없다”는 게 그의 답이다.

“아파트도 가치 있는 공간이에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집이 돼 줬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건축의 가치요. 저는 건축이라는 말보다 공간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간요. 그것이 미술관이든, 호텔이든, 원두막이든 말이죠.”


amigo@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