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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난과학] 여성 위협하는 과학의 성차별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 안전벨트를 매고 동일한 속도로 주행하다가 사고를 당했을 때 여성의 부상률이 남성보다 47%나 높습니다. 여성의 부상은 시속 20~65㎞에서 남성의 부상은 시속 65㎞ 이상 속도에서 나타났는데요. 남성과 여성이 다칠 확률이 달랐던 건 차량 충돌실험 때 사용된 인체 인체 모델이 일반 남성을 기준으로 제작됐기 때문입니다.

#. 대체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암 발생 비율이 높지만, X-레이 검사를 받을 때 쬐는 방사선에 의해 생기는 암 발생은 여성이 훨씬 높습니다. 피폭 기준이 건강한 남성을 표준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나 어린이는 필요 이상으로 방사선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 구글 번역기는 남성 대명사를 기본으로 설정해 번역해왔습니다. 여성 이름에도 불구하고 번역된 문장에서 ‘그가 ~말했다(He said)’와 같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했었지요. 론다 슈빙어 미국 스탠포드대 석좌교수는 이러한 문제점을 구글 측에 전달했고 구글은 괄호를 통해 그가 그녀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는 방식으로 번역 기준을 바꿨습니다.

남녀의 생물학적인 성(sex)과 사회적인 성(gender) 차이가 간과된 과학기술 연구 사례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애플은 ‘오늘 몇 걸음 걸었는지’, ‘혈압이나 심박동수가 어땠는지’ 추적하는 건강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지만 정작 여성의 생리주기는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구글 이미지로 ‘CEO’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11%만이 여성으로 나오지만 실제 미국의 여성 CEO는 27%를 차지합니다. 객관적인 분석과 실험을 거쳐 결과를 도출하는 과학기술 연구에서조차 지난 수십 년간 성 다양성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던 겁니다. 

안전벨트를 매고 동일한 속도로 주행하다가 사고를 당했을 때 여성의 부상률이 남성보다 47%나 높다.

▶ 다름에 대한 편견을 깨다 = 표준에 따라 가설을 세우고 과학기술과 의학 연구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이 디자인 됩니다. 특정 집단만을 표준으로 개발된 기술은 때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0여 년 전 미국에서 금지된 10개의 의약품 중 8개의 의약품이 여성에게 심각한 위험을 끼쳤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는데요. 수컷 쥐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거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2011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연구 분야에서 젠더 차이를 고려한 연구를 확산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졌습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모여 성별에 따른 연구 결과의 차이를 공유하고 논의하는 자리인 ‘젠더서밋’이 개최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엘리자베스 폴리처 영국 포샤(PORTIA) 소장은 지난 26~28일 서울에서 열린 ‘2015 아태 젠더서밋’에서 “남녀의 다름을 인정하고 과학 연구에 이같은 차이를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포샤는 여성 과학자들이 연구 현장에서 발생하는 성 편중 문제를 알리고 바로잡기 위해 1997년 설립된 비영리 기관인데요. 이들의 노력으로 현재 영국 정부는 의학 분야에서 성 편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적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서울 중구 프라자 호텔에서 열린 ‘2015 아태 젠더서밋’ 기자간담회. 유럽/미국 젠더혁신 프로젝트 책임자인 론다 쉬빙어 미국 스탠포드대 석좌교수는 ”젠더에 대한 지식을 바꾸는 전략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젠더 편견을 없애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이미 선진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2001년 국가과학재단(NSF)을 통해 젠더 다양성을 반영하는 과학연구 지원 펀딩인 ‘NSF 어드밴스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2010년엔 심장학 관련 저널들이 투고 지침을 개정해 임상연구 결과 보고 시 젠더 영향 보고를 의무화했고 지난해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연구 개발에 사용되는 동물의 성비를 맞춰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했습니다.

유럽연합(EU)도 지난 2001년 연구비 지원 시 젠더 이슈 고려를 의무화한다는 개정을 추진한 바 있는데요. 이후 약물 임상시험을 위한 구체적인 젠더 고려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습니다.

지난 27일 젠더서밋 기조연설. 제랄딘 리치몬드 미국과학진흥협회 회장은 “혁신을 할 때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국내는 아직 ‘걸음마’ =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젠더 혁신 논의는 초기 단계입니다. 지난 2013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에서 수행한 ‘과학과 엔지니어링에서의 젠더를 반영한 연구개발 혁신방안’ 연구로 과학기술 젠더혁신 개념이 도입됐고 지난해 6월 ‘젠더혁신포럼’이 창립되면서 공론화됐습니다. 지난 26일부터 사흘간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서는 첫 번째로 한국에서 젠더서밋이 열리면서 젠더 특성을 반영한 과학기술 연구가 선행되고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요.

과학기술 연구에서 다름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깨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연구자의 이해와 연구정책 전문가의 관심은 물론 사회적인 합의가 우선돼야 하지요. ‘편견을 깨는 것이 원자를 깨는 것보다 더 어렵다.’ 아인슈타인도 이같이 지적한 바 있는데요. WISET 이혜숙 소장은 “남녀 성차에 관한 편견을 깨고 ‘모두를 위한 연구개발’이 가능하도록 최대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며 “젠더 특성을 고려한 과학기술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면 창조경제에 이바지하는 바도 클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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