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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검은황금' 없는 사우디 왕자…알 왈리드의 성공비결
[헤럴드 경제 = 이윤미 기자] 지금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은 세계 4위의 억만장자 알 왈리드 빈 탈랄 알 사우드 왕자(60)다. 지난해 개인 재산 320억 달러(약 36조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힌 그는 오일머니 없이 오로지 자수성가로 25년 만에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21세기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꼽힌다. 매년 25퍼센트의 수익을 올리는 ‘투자의 신’으로 불리는 그는 씨티그룹, 펩시콜라, 애플, 트위터, 타임워너, 포시즌호텔, 디즈니의 최대 개인주주이다. 화려한 부의 제국을 건설한 그의 시작은 방 네개 짜리 조립식 컨테이너였다.

미국식 경영과 사고방식을 벤치마킹하다=알 왈리드는 왕자의 신분이지만 7살 때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함께 레바논에 살면서 왕자의 특전을 누리지 못했다. 가출과 방황을 거듭한 그는 미국 먼로대학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뜨게 된다. 반항아에서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해 돌아온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3만 달러(한화 3300만원)로 컨테이너 건물에서 회사를 차렸다. 그러나 두 세달 후엔 돈이 바닥나 어쩔 수 없이 집을 담보로 3만 달러를 대출 받았다. 한번 아찔한 경험을 한 그는 돈을 날리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재투자했다. 돈이 아까워 여행도 하지 않았다. 단 1리얄, 1달러라도 아끼고 불리려 애썼다. 그런 절약과 재투자로 그는 3년 후에는 2층 단독 건물을 가질 수 있었다. 사업 초기, 그는 외국기업들의 사우디 건설 계약에 참여함으로써 수익을 올렸고 부동산 거래로 종잣돈을 모았다. 

사우디 알 왈리드

왈리드는 활황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어떤 사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눈독을 들인 분야는 건설과 부동산. 그는 첫 대규모 부동산 투자로 야심만만하게 리야드 중심부의 거대한 부지를 골랐다. 땅의 소유주에게 접근했지만 호가가 높아 단념하고 때를 기다렸다. 1990년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전쟁이 더 크게 번질 것을 우려한 리야드의 지주는 겁에 질려 땅을 3분의 1가격으로 내놓았다. 그는 즉각 땅을 사들였다. 3분의 1 면적에 유럽, 중동, 아프리카를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인 킹덤센터를 세우고 나머지 부지는 3~4년 후에 매각했다. 수익률은 400퍼센트 이상이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호황은 그의 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유가는 연일 기록을 경신했고, 국가 지도층은 도로, 건물, 담수화공장부터 통신망, 군사시설까지 인프라 건설에 수십억 달러를 퍼부었다. 왈리드는 리야드의 부동산 시장에 재투자함으로써 빠르게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그의 배경도 성공에 단단히 한몫했다. 왕과 내각 장관 등 의사결정권이 있는 이들을 숙부로 뒀다는 사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투자하려는 외부 사업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학력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서구식 사업전략을 구사하고 ‘협상’이란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그와 합작한다는 사실에 서구의 사업가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알 왈리드의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을 꼽자면, ‘미국식 경영 스타일’이라 해야 옳다. 그는 미국 대학에서 배운 비즈니스 스킬과 투자전략을 실습하듯 사우디아라비아에 그대로 적용했다.

시간투자와 신중한 사업계획, 사람을 대하거나 회의를 할 때 필요한 프로페셔널리즘 등 스타일 뿐만 아니라 적대적 인수, 합병 등 미국식 사업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이 기술은 은행업에 진출할 때 빛을 발했다.

부동산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자 미국 시러큐스대 사회과학 박사과정에 등록해 미국의 라이프스타일을 철저하게 연구한 왈리드는 리야드로 돌아오자 은행업에 눈을 돌린다. 그는 시장에 끌려가는 대신 시장을 형성하는 전문가로 성장하려면 한 단계 더 도약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은행인수에 나선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든 은행법인을 평가해 고른 곳은 바로 사우디연합상업은행. 모든 인수 대상 후보 중 가장 실적이 좋지 않아 수년간 수익이 나지 않고 망하기 일보 직전인 은행이었다. 왈리드는 1986년 7퍼센트의 지분보유와 주요 주주들의 위임으로 경영권을 확보해 사우디 재계를 놀라게 한다. 이는 전례가 없던 미국식의 적대적 인수방식이었다. 2년 후 왈리드는 비용절감과 신규사업으로 회사를 흑자로, 이듬해에는 가장 수익성 높은 상업은행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금융 정보력이야말로 알 왈리드가 억만장자로 거듭난 비결이다.

사우디에 적대적 인수의 개념을 도입한 왈리드는 다시 합병에 눈을 돌렸다. 그는 사우디카이로은행의 지분 상당량을 인수해 1997년 두 은행을 합병, 사우디연합은행을 탄생시킨다.

이후 알 왈리드의 표적은 식품과 축산으로 옮겨갔다. 사우디 최대 슈퍼마켓 체인 중 하나인 알 아지지아판의 최대주주로 나선 데 이어 사볼라와의 합병, 산업 투자 전문의 대형 합자회사인 국영산업화기업 인수 등 거침없이 부의 제국을 확장하며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성장에 목말랐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이 첫 대출을 받았던 씨티은행이 지분을 갖고 있던 사우디아메리칸은행에 손을 뻗었다. 알 왈리드의 투자 성공의 열쇠는 ‘훌륭한 투자’로 모아진다. 투자의 유일한 판단기준은 매입가. 그는 바로 자신이 원하는 진입점에 들어올 때까지 1년, 2년, 심지어 5년도 기다렸다.

▶‘일중독자’ 알 왈리드의 완벽한 준비= 씨티은행 투자는 몇 억달러를 투자해 운좋게 몇 십억달러로 불린 사례가 아니다. 그는 전략을 철저하게 세웠다. 3년 동안 은행업계 연구를 바탕으로 해당 기업을 조사한 뒤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우위를 따져 가능한 매수 진입점을 결정하고 때를 기다렸다.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몰락하고 있던 씨티은행의 투자는 한편의 드라마로 얘기된다. 글로벌 일류 브랜드의 주식을 거머쥘 기회를 그는 놓치지 않고 매의 눈으로 주시했다. 당시 씨티은행 경영진은 고립무원 상태였다. 미국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고 구원을 요청하려 한 쿠웨이트는 전쟁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었다. 왈리드는 이 기회를 백분 활용했다. 협상은 지지부진했지만 왈리드는 자신의 입지가 강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씨티은행 주가는 더 폭락했고 아무도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1991년 2월 거래는 성사됐다. 이후 왈리드는 미디어에 눈을 돌린다. 1990년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세계 최대의 미디어그룹 뉴스코퍼레이션이 그 대상. 뉴스코퍼레이션은 하퍼콜린스, 20세기 폭스, Sky TV, 스타TV, 타임스 등 최고 브랜드를 포함, 영화 제작, 보도, 편집, TV 등 800개 이상의 기업을 거느린 미디어 제국이다. 왈리드는 지분 5퍼센트를 인수해 루퍼트 머독과 존 멀론에 이어 뉴스코프의 3대 주주가 됐다.

알 왈리드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나오고 가장 힘들 때 그에게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1997년 애플컴퓨터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해 애플 지분의 약 5퍼센트를 확보했다. 1995년 중반, 약 50달러로 치솟았던 애플의 주가가 18달러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1999년 12월 애플의 주가는 96달러까지 뛰었다. 결국 왈리드는 애플의 최대 주주가 됐다. 그는 모토로라, 트위터 등 IT기업에도 투자해 거액을 벌어들였다. 그의 투자는 모험보다는 신중론 쪽에 가깝다. 그의 공식 전기, ‘알 왈리드,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김영사)에서 왈리드는 “너무 심한 모험은 도박이다. 나는 도박가가 아니라 모험가다. 철저하게 계산하는 모험가”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왈리드는 세계 4위 부호의 타이틀에 만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일중독자다. 이를 위해 잠 자는 것 조차 아까워할 정도다. 약속 시간에서 1분을 어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약속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지키며 자신에게 더 혹독하고 매서운 잣대를 들이댄다. “더 잘하고 개선해서 늘 1등을 하는” 그의 체질이 어디까지 부를 확장할 지 관심사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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