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역사의 민낯]47차례나 영조의 패초에 응하지 않은 이조판서
패초(牌招)는 국왕이 승정원을 통해 해당 관원의 이름을 패에 적어 부르던 제도이다. 법규상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에 응해야 했지만 패초에 응하지 않아 처벌을 받은 사례도 많다. 당시 관원들은 패초를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1726년(영조 2) 4월부터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계속해서 패초를 어긴 일이 벌어졌다. 문제의 발단은 대사헌 정형익(鄭亨益)이 조정의 신하가 거의 다 모인 자리에서, 이병상이 대제학을 겸직하는 것은 기강과 체모에 어긋난다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병상은 이를 두고 공적인 탄핵을 받은 것이라고 상소를 올려 체차(경질)를 청하였다. 이후 영조는 47차례나 이병상을 패초하였지만 이병상은 응하지 않았다. 결국 영조는 5월 29일 비답을 내려 대제학 겸직을 체차해 주었다.

경은 참으로 심하게 고집을 부리고, 참으로 지루하게 소명(召命)을 어긴다. 여러 차례 혐의를 풀어 주었는데 조금도 생각을 바꾸지 않아 47번이나 패초하게 하여 패초를 형식적인 일처럼 만들어 버렸다. 염치로 보나 일의 체모로 보나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경도 분명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뜻이 정해진 이상 백 번을 어긴다 한들 어찌 체차하겠는가. 다만 군신 간에는 서로 마음이 미더운 것을 귀하게 여긴다. 경의 상소를 연달아 보고 경이 스스로 결심한 뜻을 알았는데, 이런 줄을 알면서도 줄곧 강요한다면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뜻이 아니다. …… 겸직한 대제학은 지금 우선 체차해 주겠다. 아, 내가 경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하였는데, 경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모름지기 이러한 마음을 헤아려 속히 나와 공무를 행하여 본직을 오래 비워 두지 말라.



‘승정원일기’의 패초 관련 내용을 통해 신하를 불러오려는 임금의 ‘간절한 마음’뿐만 아니라 ‘신하 된 도리’(分義)와 ‘처신의 도리‘(處義) 사이에서 고민하는 신료들의 심정도 헤아려 볼 수 있다.

강성득(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