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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풀꽃도 창씨 개명 당했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큰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도둑놈의갈고리, 좀개갓냉이…

예쁜 들꽃에 이런 저속한 이름을 도대체 누가 붙였을까, 한번쯤 생각해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이름들은 일본 학자에 의해 창씨 개명된 걸 우리 말로 번역한 것이다.

큰개불알꽃은 오이누노후구리(大犬の陰囊)라는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이름을 붙인 이는 일본의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로 마키노는 큰개불알꽃의 열매가 개의 음낭(이누노후구리, 犬陰囊)을 닮았다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사진제공=인물과사상사]

며느리밑씻개는 마마코노시리누구이(繼子の尻拭い)에서 유래한 이름. 마마코노시리누구이는 ‘의붓자식의 밑씻개’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의붓자식’이 ‘며느리’로 바뀐 경우다. 가시가 촘촘히 난 풀로 밑을 닦는다는 발상 자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일본 말에서 유래한 이들 꽃이름이 식물도감에 버젓이 올라 있다.

일본 속의 한국 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이 식물의 한글 이름이 기록된 ‘조선식물향명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조사,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들의 내력을 찾아냈다.

이 가운데에는 번역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엉터리 이름도 수두룩하다.

개망초의 일본 이름은 히메조온(姬女菀). 일본어 ‘히메(姬)’는 어리고 가냘프며 귀여운 것을 뜻하므로 애기망초나 각시망초로 옮기는 것이 적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히메’가 붙은 이름은 대부분 ‘각시’나 ‘애기’로 번역된다. 그런데 개망초 등 일부 식물은 ‘히메’를 ‘개’로 번역해놓았다. 

 
[사진제공=인물과사상사]

등대풀의 경우에는 얼핏 바닷가에 높게 선 등대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식물은 바닥에 낮게 붙어서 피기 때문에, 등대와는 거리가 멀다. 등대풀의 유래는 일본의 ‘어원유래사전’에서 찾을 수 있다. “등대풀의 등대는 옛날 집안의 조명 기구인 등명대를 말한다”는 것이다. 등대풀이라는 한글 이름이 처음 보이는 문헌은 ‘조선식물향명집’으로 ‘등대풀(Dungdaepul)’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일본 말의 등대가 등잔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고 번역한 것을 받아들여 지금까지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장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식물을 채집, 조사하면서 그 가운데 상당수에 ‘조선’이나 ‘고려’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현재 조선이나 고려가 붙은 들꽃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식물 이름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조선이나 고려 등을 빼고 옮겼기 때문이다. 봄을 대표하는 꽃인 개나리의 일본 이름은 조센렌교(チョウセンレンギョ)다.

일본 말로 조선(朝鮮)을 뜻하는 조센(チョウセン)이 붙어 있으나, 번역자들은 ‘조선’ 대신 ‘개’를 붙여 개나리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개나리 외에도 개암나무, 개벚나무, 개비자나무 등이 ‘조선’이 ‘개’로 번역된 경우다. 저자는 ‘조선식물향명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조사해 2079종의 식물 중 99종에 달하는 식물 이름에서 ‘조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런가 하면 식물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학명에 남은 일제 잔재도 심각하다. 국립생물자원관에서 만든 ‘한반도 고유종 총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반도 고유 식물은 모두 33목 78과 527종이다. 이 소장에 따르면 이 가운데 일본 학자 이름으로 학명이 등록된 식물은 모두 327종으로 무려 62퍼센트에 달한다. 
[사진제공=인물과사상사]

금강초롱은 금강산 등 산지에서 자라는 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반도 특산종. 하지만 금강초롱은 예전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이름을 붙인 화방초(花房草)라고 불렸다. 하나부사는 초대 일본 공사로, 일제의 조선 강점 발판을 마련했던 인물 중 하나다. 하나부사는 한반도 자연을 착취하기 위해 각종 자원을 조사했으며, 그 과정에서 나카이 다케노신을 비롯한 일본 식물학자들을 지원했다. 금강초롱은 이제는 더 이상 화방초라 불리지 않지만 학명(Hanabusaya asiatica Nakai)에는 여전히 하나부사의 이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조선화관, 또는 평양지모라 불리는 사내초(寺內草)는 악명 높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바쳐진 이름이다. 데라우치는 헌병 주체 경찰을 편성해 한일병탄의 기틀을 마련하고 이완용에게 병탄 안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런 “데라우치의 공을 기리고자 붙인 이름이 바로 사내초다. 사내초는 현재 조선화관이나 평양지모로 불리고 있지만, 학명은 여전히 데라우치 총독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풀꽃 이름뿐 아니라 풀꽃을 설명하는 국어사전이나 식물도감의 설명도 청산되지 못한 일본 말 찌꺼기로 설명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창씨 개명된 우리 풀꽃들‘(인물과사상사)을 펴낸 이 소장은 “우리 겨레는 오래전부터 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해왔고 당연히 오랫동안 불러온 우리 고유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정부 및 관련 기관은 이 문제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일부 학자들은 예전부터 써오던 이름은 바꾸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며, “이제라도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우리의 풀꽃에 우리 이름을 붙여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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