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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시생ㆍ로스쿨생 乙乙싸움”…사시존치운동 벌이는 고시생들
[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꿈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를 왜 ‘고시 낭인’으로 치부하나요?”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 모임’이 국회 청원을 위한 고시생 서명운동 목표로 삼은 1000명 달성을 눈앞에 둔 가운데, 서명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표 권민식(37)씨와 총무 김지은(25ㆍ가명)씨를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서 만났다. 사시 폐지까지 2년, 하루하루를 시한부 인생처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서명운동은 고시생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낼 유일한 수단이자 희망이었다.



▶사시생은 왜 로스쿨을 안 갔나?=법조인 양성제도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으로 단일화하는 로스쿨법이 통과된 지 8년이 지났지만 로스쿨 진학 대신 사시를 준비 중인 고시생은 현재 전국적으로 3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작년 연말 사시 준비를 시작한 김씨처럼 최근 사시에 뛰어든 고시촌 ‘신규 진입자’도 적지 않다.

두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로스쿨은 ‘실패작’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고졸도 응시할 수 있는 사시와 달리 대학원을 나와야만 하는 불평등한 제도라는 것. 연간 1500만원에 달하는 비싼 학비도 문제였다. 로스쿨 입학정원 중 전액장학금 대상은 6%를 조금 넘는다.

방세와 생활비, 책값, 학원비 모두 합쳐 매달 80만원으로 생활하는 권씨는 “저 같은 가난한 서민에겐 로스쿨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단언했다. 등록금뿐 아니라 각종 생활비, 주거비, 학원비, 책 구입비까지 따져보면 한 해 2000만원 넘는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 몇년 전 장학금을 받지 못한 로스쿨생이 학비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지난 22일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서 만난 ‘사법시험 존치를 위한 고시생 모임’ 대표 권민식(37ㆍ오른쪽)씨와 총무 김지은(25ㆍ가명)씨. 지난달부터 사시 존치를 위한 국회 청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 언론 인터뷰에 나서지 않았다. 사시생 대표를 자처하는 것처럼 비춰질 것이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한 두 사람은 1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가슴 속에 담아놨던 진솔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서명운동 참여자 1000명 달성이 임박하자 ‘고시생 모임’은 지난 18일 집행부를 선출하고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다. 오는 29일 사시 존치 토론회가 열리는 국회에 방문해 ‘피켓팅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권씨는 또 “민간 자격증을 따러 가는 로스쿨에서 나오는 장학금 400억원이 국민 세금이며 사립대가 다른 단과대에서 끌어쓰는 등록금이 매년 900억원에 달한다. 난 뻔뻔하지 않아서 못 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스쿨 교육에 대한 불신도 컸다. 기간도 3년으로 극히 짧은데다, 이론 수업이 80%로 실무를 충실히 배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김씨는 “변호를 제대로 못해 의뢰인에게 손해배상을 해줘야 할 노릇”이라면서 “로스쿨 다니며 받은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생계 유지는 되겠느냐”고 꼬집었다.

과거 모교 고시반 담당교수로부터 토익 점수만 받아오면 로스쿨에 합격시켜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는 권씨는 불신의 골이 더욱 깊었다.

그는 “법조인 선발의 핵심은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면서 “이런 제안이 이뤄진다는 것 자체가 로스쿨은 법조인 선발 방식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최근 헌법재판소가 변호사시험 성적 비공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건 로스쿨 부실 교육에 대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김씨가 고시촌 골목을 돌아다니며 수작업으로 제작한 ‘사시생 피켓팅 행사’ 안내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 ‘고시생 모임’은 오는 29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에서 김관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서울지방변호사회 공동 주최로 열리는 ‘사법시험 존치와 그 방법론’ 세미나에서 피켓팅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특히 권씨는 “51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997명 중 625명은 대졸 이상 학력자, 372명은 그 이하 학력자다. 그 중 30% 이상은 비법학 전공자로서 로스쿨이 주장하는 다양한 분야의 인재 육성이라는 목표를 이미 수행하고 있었다”면서 “이에 반해 고졸 이하 학력자가 검정고시와 독학사 등을 거쳐 로스쿨에 입학해 변호사가 될 확률은 0%에 가깝다”고 일침을 가했다.

▶사시존폐 논쟁은 ‘乙乙갈등’=사시 존치 운동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로스쿨생을 적(敵)으로 보지 않았다.

소위 ‘비(非) SKY대’ 로스쿨에 다니는 서민층 학생들도 고위층 자제 로스쿨생을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 결국 사시생이나 대다수 로스쿨생이나 ‘을(乙)’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권씨는 “로스쿨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정치인들과 억대 연봉을 받는 교수들은 논쟁에서 쏙 빠지고 나머지가 서로 물어뜯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사법연수원에서 취직이 안 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천지다. 우리가 사시에 합격해 사회에 나가더라도 약자가 된다”면서 “기득권은 기존 법조인들인데 만만한 사시생만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도 “가진 것 없는 절박한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가져보겠다고 싸우고 있다”면서 사시 존폐 논쟁이 로스쿨생과 사시생 간의 ‘인터넷 댓글 전쟁’으로 흘러가는 현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사시는 리트머스…행시부터 9급까지 ‘도미노’=사시가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확고했다.

학벌, 학점, 영어, 법학적성시험에 다양한 사회경험과 봉사활동까지 로스쿨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은 돈으로 완성된다는 얘기다. 두 사람은 “사시 폐지는 한국에서 서민 자제가 응시할 수 있는 모든 공정한 시험이 축소된다는 걸 의미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사시 폐지로 인한 피해는 5급(행정고시)부터 9급까지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생)으로 도미노처럼 확산했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사시를 포기한 고시생 대다수가 로스쿨 대신 행시나 7ㆍ9급 공시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실제 권씨는 내달 치러지는 법원행시에 응시하며 김씨도 사시가 폐지되면 7급 공무원이나 법무사 시험 준비를 알아볼 계획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인터넷 행시 카페에는 ‘사시를 존치시켜야 행시도 산다’, ‘우리가 사시 존치 운동에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는 웃지 못할 글까지 올라온다고 했다.

▶“고시생이 낭인이라고?”=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사시생에게 ‘고시 낭인’이란 딱지를 붙이는 게 큰 상처가 된다고 전했다. 사시 2차 관문에서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권씨는 이른바 낭인 프레이밍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았다.

그는 “사시 제도에 문제가 없으니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을 문제 삼는다”면서 “낭인으로 공격을 당하니까 많이 위축된 사시생들이 많다”면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열심히 공부하다 시험에 떨어진 것뿐인데 왜 그렇게 불려야 하나”고 따져물었다.

또 김씨는 “로스쿨을 도입 이후 사시 선발인원을 줄이면서 똑같이 노력을 해도 예전처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로스쿨 도입을 주도한) 교수들이 낭인을 만들어놓고 사시를 폐지해야 한다니 말이 되느냐”면서 “매년 양산되는 로스쿨 입시 낭인, 변시 낭인은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권씨는 사시에 뛰어든 지난 10여년 동안 틈틈이 헌혈을 했다. 백혈병을 앓는 후배 때문에 혈소판 헌혈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70차례 가까이 헌혈을 해 적십자헌혈유공장 금장까지 받았다. 그는 사시를 준비하면서 경제적 수입이 전혀 없는데도 이런 봉사활동을 계속해왔는데 사시생을 ‘낭인’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앞으로 ‘고시생 모임’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설 계획이다. 지난 18일 집행부를 선출한 데 이어 매주 일요일 회의를 열어 사시 존치 방안 마련을 위한 고시생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을 예정이다. 오는 29일에는 사시 존치 세미나가 열리는 국회에 방문해 ‘피켓팅 시위’를 벌인다. 2009년 변호사시험법 제정과정에서 ‘2013년 예비시험 재논의’라는 부대의견을 달았고 헌재에서 위헌 결정까지 나왔지만, 정치권에서 사시 존치와 로스쿨 제도 개선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적극 피력할 방침이다.

사시 준비를 접더라도 사시 존치 운동을 이어가겠다는 두 사람은 “사시가 폐지되면 젊은 세대 전부에게 절망을 안길 것”이라면서 “우리 사회 먹이사슬의 가장 끝에 있는 약자들을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sp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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