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READERS CAFE]‘19세기 한류스타’ 김정희를 아시나요?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2002년 추사 김정희 붐을 일으키며 화제가 된 책이 있다. 유홍준이 쓴 ‘완당평전’이다. 완당의 발자취와 추사체의 걸작들을 설명한 이 책은 대중들에게 추사체의 진경을 느끼게 해주는 길잡이로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책은 후지쓰카 지카시라는 일본 학자의 연구성과를 유홍준이 그대로 갖다 쓴 것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가 추사와 금석학 전문가인 박철상(49) 박사다.


최근 독보적인 추사 연구서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너머북스)를 펴낸 박철상씨는 이 책을 통해 김정희의 금석학 전모를 담아냈다.

책 제목은 추사가 쓴 대련 중에 ‘호고유시수단갈 연경누일파음시‘(好古有時搜斷碣 硏經누(다락 누자에서 나무 목자를 뺀 글자)日罷吟詩: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에서 따왔다.

박 씨는 추사는 한마디로 19세기 중국을 흔들어 놓은 한류스타였다고 말한다.

“청나라의 학문은 고증학이잖아요. 경전이나 역사책의 기술이 맞는지 돌에 새겨진 비문, 석문을 통해 맞춰보는 게 대 유행이었죠. 그때 옹방강이라는 대가가 신라시대 비문에서 왕희지체를 발견하면서 조선의 금석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당시 청나라에서 조선의 금석문은 미지의 분야였어요. 연행 오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금석문을 갖다 달라고 요청하고 수집하는 열풍이 심하게 인 거죠. 특히 너도 나도 추사와 인연을 맺으려고 경쟁이 심했습니다.”

“‘호고’(好古)라는 두 글자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이죠. 옛것을 좋아하다 보니 본받게 되고, 제대로 옛것을 본받는 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는 거죠.”

추사가 ’중국의 스타’로, ‘금석학의 대가’로 우뚝 선 사건이 1816년에 일어났다. 바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발굴과 판독이다.

1816년 7월 어느날 추사는 북한산 승가사 뒤쪽의 비봉(백운대)에 올라가 그때까지 무학대사 또는 신라 도선국사의 비석으로 알려진 옛 비석의 정체를 밝혀낸다. 이것은 ‘신라진흥대왕의 비석이다’라는 글자를 판독해낸 것이다. 조선 금석학의 탄생이다.

사실 추사가 금석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데는 청나라 대표 지식인 완원과 옹방강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추사는 24살 때인 1810년 연행을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나섰다가 이 두 스승을 만나게 된다. 옹방강과 그의 아들 옹수곤 부자는 추사가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완원은 추사체 탄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특히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의 교유는 김정희 금석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된다.

“옹수곤은 조선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했는데 의문점을 김정희에게 묻고, 김정희는 탁본을 보내고 대답하는 글을 주고 받습니다. 그런 식으로 김정희는 금석문의 연구방법론을 터득했던 거죠. 그러다 1815년 옹수곤이 갑자기 사망하고 아버지 옹방강이 아들의 죽음을 추사에게 전하는 편지를 보내죠. 이 때 옹수곤의 조선비문 연구자료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옹수곤의 사망 이후 추사는 금석학에 본격적으로 매진한다. 1년 후 진흥왕순수비를 밝혀낸 게 그 첫 성과. 이듬해 추사는 보름간의 경주여행 끝에 문무왕비와 무장사비를 발굴하는 성과를 낸다. 그동안 탁본과 문헌을 통해서만 연구해온 것을 실사를 통해 확인, 밝혀낸 것이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문무왕비, 무장사비 등 조선 역사상 최고의 비문이 김정희에 의해 발견되고 탁본으로 청에 건너가면서 김정희는 일약 중국의 ‘만나고 싶은 인사’ 1순위에 오른다.

박 씨는 김정희 금석학의 위대함은 역사 고증뿐만 아니라 서법 고증에도 있다고 설명한다. 서법고증을 통한 추사체의 창조야말로 추사 금석학의 또 다른 정수라는 것이다. 추사는 금석학을 통해 신라와 고려시대 등 서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고. “신라와 고려의 금석은 모두 구양순의 서법인데, ‘평백제탑’은 저수량의 서체”라고 분석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추사는 스승 완원의 ‘북비남첩론’을 받아들여 구양순과 저수량의 서법, 근엄하고 졸박한 서체 전환을 강조하기도 했다.

1810년 연행에서 돌아온 김정희가 쓴 글에는 이런 생각이 담겨있다.

“내가 연경에 갔다 온 뒤로 서법이 날로 졸실한 데로 나아가 다시는 옛날의 분화한 모습이 없게 되었는데 내 글씨를 본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다”고 추사는 썼다.

박씨는 “추사는 호고, 즉 옛것을 좋아하고 정통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며 “여기에서 고(古)라는 게 본질이 뭐냐는 건데, 추사는 당시 유행했던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그 본질을 끝까지 밀고 갔다”고 말했다. 즉 역사 고증은 ‘진흥왕순수비’ 등과 같이 조선의 실물을 대상으로 삼아 조선의 역사를 중국에 알리고, 서법 고증은 중국의 글씨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한나라 때 글씨를 기본으로 추사체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추사의 글씨 한 점을 얻으려 경쟁을 벌였고, 스승 완원도 글씨를 얻어 방에 걸어 놓았던 것으로 전한다.

“그게 법고창신이에요. 법고에 철저하지 않으면 새로운게 나오지 않는다는데 김정희 금석학의 현재적 의미가 있어요.”

이 책에는 추사의 대표 저서로 교과서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는 ’예당금석과안록‘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도 들어있다. 김정희는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기록을 남기면서 ‘금석과안록’이라는 명칭 대신 ‘비고’(碑攷)라는 말을 썼다. 박 씨에 따르면 ‘예당금석과안록’이라는 이름은 이를 처음 발견한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이란 주장이다.

내년은 추사가 조선 금석학의 문을 연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발굴한 지 200년이 되는 해다.

박 씨는 “일제시대 학자들이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잘못된 지식이 그대로 굳어졌다”며 “내년 진흥왕순수비 발굴 200주년을 맞아 추사를 제대로 조명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