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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팔이·알바·저임금…오늘도 무명배우들이 스러진다
배우 김운하·판영진 사망계기…생활고등 처우문제 다시부각
종사자 67%가 월수 100만원이하



#. 5년차 연극배우 이찬웅(31ㆍ가명) 씨는 연극생활 초반 ‘표팔이’로 살았다. 극단에서는 출연료를 주지 않고 연극 표를 무더기로 줬다. 열명이든 스무명이든, 표당 만원이든 만오천원이든, 능력껏 팔아 연극 출연료로 ‘퉁치라는’ 것. 가족, 친구 동원해 20장을 팔아도 떨어지는 돈은 30만원 남짓이었다. 이씨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었지만 힘들게 공연을 올리는데 지인에게 표 팔아달라 구걸하는 게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연극배우 김운하(40), 판영진(58) 씨의 잇단 사망 소식에 무명 연극인들을 비롯한 대한민국 문화예술인들의 생활고 문제가 재부각되고 있다.

연극배우 김운하(40), 판영진(58) 씨가 생활고와 지병ㆍ우울증 등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대한민국 문화예술계가 술렁이고 있다. 24일 극단이 밀집해있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를 찾은 시민들의 모습.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저평가된 임금, 불안정한 고용, 아르바이트 생활, 배우간 수입 양극화 등으로 나타나는 문화예술산업 전반의 처우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25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장한성(37ㆍ가명) 씨. 연극판에 뛰어든지 10년이 된 그는 체념한듯 생활고를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지 오래라고 했다.

처음 극단에 들어가 생활할 때는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까지 오고 가는 지하철이 유일하게 잠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연수단원이었기 때문에 연극으로 버는 돈이 없어, 일과가 끝나면 먹고살기 위해 아르바이트 3개를 뛰었다.

이씨는 “신문 돌리기, 지하철 스크린도어 닦기, 가게 서빙까지 밤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다시 새벽 첫차를 타고 극단으로 향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이러다 사람 죽겠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고 말했다.

대학때 시작한 연극생활을 6년 전부터 대학로 극단에서 이어가고 있는 정윤진(32ㆍ여ㆍ가명) 씨는 “투자를 거의 못 받는 정극을 할 때는 3개월 준비하고 공연 올려서 단돈 7,8만원 손에 떨어진 적도 있다”며 “연극 시작하고 항상 알바 인생을 살았다”고 말했다. 정씨는 “연극판에 김운하 씨처럼 죽는 사람이 많다는 게 절대 거짓말이 아닐 것 같다”고 우려했다.

숨진 지 5일 정도 지난 상태에서 발견된 고 김운하씨의 시신은 무연고자로 처리돼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인들이 개인재산을 털어 빈소를 마련했다.

고 판영진의 경우 평소 생활고를 비관하고 우울증을 앓았다. 그는 앞서 지난 1월에도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무명 문화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는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라는 쪽지를 남기고 사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예술인 복지법(일명 최고은법)’이 마련됐지만 대다수 연극인의 고통을 보듬기엔 역부족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3년마다 시행)에 따르면, 문학ㆍ미술ㆍ음악ㆍ연극 등 10개 분야 2000명 문화예술인의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을 조사한 결과 100만 원 이하인 사람이 66.5%, 50만 원 이하인 사람도 51.4%였다. 이중 아예 ‘없다’라고 답한 사람도 26.2%에 달했다.

2015년 1인 가구 최저생계비가 61만7238원인 점을 감안하면, 문화예술인 절대다수가 창작활동만 해서는 빈곤층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올해 초 예산으로 110억을 배정받고 ‘예술인 창작준비금’ 사업 진행을 예고했지만 아직 예산이 교부되지 않았다. 올해 지원금 수혜자는 6월 말이 되도록 ‘0명’이다.

또 자신이 예술활동에 종사한다는 증명 과정이 필요한데 ▷연극 분야는 최근 3년 동안 3편 이상의 작품 출연 ▷문학 분야는 최근 5년 동안 5편 이상의 작품이나 비평을 문예지에 발표 등 기준이 까다롭고 심사 과정도 3~4개월로 길어 ‘긴급지원’이라는 취지가 무색한 셈이다.

임선빈 서울연극협회 사무국장은 “예술인 복지법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고도 심사가 까다로워 지원하기 힘든 예술인이 많다”면서 “전반적인 사회복지망을 끌어올려 기존에 팽배해 있는 ‘예술인의 생계가 어렵다는 것은 기본 생리’라는 인식 자체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세진 기자/jin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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