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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찾아 떠난 스페인 여행, 성인에게 길을 묻다
[산티아고, 로욜라, 바르셀로나=이윤미 기자 글ㆍ사진]“삶이란 각자 살아내야 할 신비이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끝, 성 야고보 성당에서 만난 최철순(60ㆍ세례명 최세실리아)씨는 순례길 어느 곳에선가 ‘포츈 쿠키’ 같은 행운의 쪽지에서 이 말을 만났다고 했다. 이순(耳順)에 접어든 그에게 이 말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흔히 인생이 힘들다고, 산 너머 산이라고 말하지만 돌아보면 꿈 같고, 내가 한 일 같지 않은 것, 인생의 행로에서 만나진 것들의 우연치 않은 삶의 비의를 누군가는 그렇게 한 줄로 정리했으리라.

지난 6월9일 산티아고 야고보 성당 증서발급 사무실 앞에는 아침부터 줄이 길었다. 짧게는 100km, 길게는 810km를, 다만 노란 화살표시를 따라 걸어낸 순례자들이다. 머리가 허옇게 센 한 남성이 도장판을 보란듯 높이 쳐들고 환호했다. 그는 그날 아침, 마지막 알베르게(순례자 전용숙소)에서 부푼 마음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온 부부, 자전거로 입성하는 청년들, 묵묵히 혼자 길을 걸어온 젊은 여성 등 순례자들은 백인백색이지만 표정은 하나였다. 메마른 듯 그으른 얼굴은 가볍고 환했다. 순례의 첫 발을 떼기까지 짓눌렀던 삶의 무게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일생에 한 번은 걷고 싶은 길’ 로 불리는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5km 앞둔 지점에서 만난 이윤정씨는 “사람에게 상처입은 마음을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치유받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걷고, 먹고, 빨래하고 자는 단순한 생활이 꽉찬 머리 속을 비워주었다고도 했다.

▶산티아고는 순례자들의 등대=한 해 산티아고 순례에 나선 이들은 20만명에 달한다. 이 중 한국인이 1만2000명으로 1위다.

산티아고 주교좌성당 세군도 페레스 주임신부는 “순례에 나서는 이들의 목적과 이유가 다양하지만 일상이 걱정으로 가득차 있는 현대인들이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 더 높은 차원의 뭔가를 찾기 위해 나서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산티아고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등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순례자의 마지막 절차는 성당에 안치된 성 야고보 무덤 위에 세워진 조각상에 키스하는 일이다. 이 의식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더 각별하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도 야고보를 통해 신앙을 확인하고 사도 야고보가 그 때 보고 들은 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한다.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순례자들은 야고보의 조각상을 껴안고 키스하며 무사히 걸어낸 감사를 표하는 행렬에 기꺼이 동참한다. 누구에게든 고마움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 벅차오름 때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광장 주변으로는 순례객 뿐 아니라 각지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 수학여행 학생들로 활기가 넘친다. 광장 앞 거리의 악사와 테너의 연주에 흠뻑 빠져 브라보를 외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하나의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 산티아고는 당시 로마의 시각에서 보면 ’땅끝‘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야고보는 이 곳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 공동체를 설립한 뒤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예수의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하게 된다. 이후 야고보의 제자들이 스승의 유해를 스페인으로 옮겼으나 사라센 침략기간 동안 유해를 잃어버렸다가 800년경 무덤을 발견, 그 위에 성당을 짓게 된다. 성 야고보 성당에선 순례자들이 7개 국어로 미사를 볼 수 있다.


▶성인에게 길을 묻다=스페인 중북부지역에는 가톨릭 영성의 거대한 두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맨발의 가르멜수도원‘을 세운 성녀 아빌라의 대(大)데레사와 예수회의 설립자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다. 둘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개신교의 분열로 홍역을 앓고 있던 가톨릭 안의 개혁을 주도하고 확장했다.

예수회 설립자 이냐시오 성인이 태어난 바스크 지방 로욜라는 우리에겐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잘 알려진 빌바오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이냐시오의 생가와 기념성당이 있는 이곳에는 해마다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자들이 다녀간다. 로욜라는 남서에서 북동쪽까지 좁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이냐시오의 생가는 15세기 군사 요새였다. 단단한 화강암 석축 위에 포탄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나 있는 요새 위에 2층 벽돌건물을 다시 지어올린 형태다. 이냐시오 기념 성당과 붙어있는 이 저택은 벽돌 벽면에 아라베스크 장식을 두르고 있으며 실내는 화려하기보다 담백하다.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가문으로 이냐시오의 할아버지 페레스데 로욜라는 민중봉기를 진압하다 국왕이 민중들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역적으로 몰려 4년간 유배를 당하고 만다. 중세 봉건 영주의 시대가 끝나고 왕권 군주의 시대, 근세가 시작되는 셈이다. 1460년 풀려난 페레스데는 요새를 복구해 로욜라 저택을 완성한다. 


1491년 로욜라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냐시오는 1506년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스페인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쿠에야르 집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1517년 군에 입대한다. 1521년 프랑스 페르난도 1세가 빼앗긴 영토회복을 위해 일으킨 나바라 팜플로냐에서의 전투는 이냐시오의 삶을 전적으로 바꿔놓는다. 이 전쟁에서 수도 팜플로냐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이내 함락당하고 이냐시오는 다리 부상을 당해 로욜라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 정신으로 무장한 젊은 로욜라에게 다리 부상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무력감을 안겨줬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란 존재론적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며 집에 있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어나가던 중 이냐시오는 이전에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화를 느끼게 된다. 그는 상념에 젖어 창밖을 보며 내면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걸 느꼈다. 그와 함께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마리아의 환시를 보게 되고 회심하게 된다. 


▶절망, 자살의 유혹에서 깨달음으로=이냐시오가 부상을 당해 누워있다 회심한 방, 생가 4층은 이냐시오 ‘성지의 심장’격이다. 이 방은 지금 소성당으로 꾸며져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을 한 이냐시오는 순례길에 올라 톱날산으로 불리는 몬세랏에 도착한다. 블랙마돈나 앞에서 그는 기사의 상징인 칼을 내려놓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거지에게 내주고 대신 감자 포대를 걸친 뒤 지팡이와 표주박을 들고 다시 길을 떠난다. 과거의 나를 버리고 헌신의 삶을 살겠다는 의식이었다. 탁발승의 모습으로 길을 나선 그는 몬세랏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 동굴을 우연히 발견한다. 멀리 구름 위에 떠있듯 솟아있는 몬세랏이 한 눈에 보이는 그 곳에서 이냐시오는 고행을 시작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자살의 유혹까지 받지만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간다. 현재 만레사 동굴은 소성당으로 꾸며져 있으며 당시 동굴 형태를 최대한 보존하고 있다. 입구에는 이냐시오가 마을로 내려가 동냥을 한 올리브나무 함지가 전시돼 있다. 수행 당시 매일 노트에 기록한 신비한 영적 체험 일기는 ‘영성수련’의 기초가 된다. 


이냐시오가 창설한 예수회는 곤경과 위기에 처해 있던 중세 말기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고 쇄신의 방향을 제시했다. 예수회의 정신은 청빈, 정결 외에 교황에 대한 순명을 지향한다. 세상 속에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걸 사명으로 삼고 높은 자리를 구하지 않는 탓에 바티칸 내 고위직에 예수회 출신이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수회 출신인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탄생이 더욱 특별한 이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 로욜라 이냐시오 성지를 두번 찾았다. 1986년 아르헨티나 지역 예수회 본부장 시절과 1991년 추기경 때 이냐시오 성인 탄생 500주년을 맞았을 때다.

예수회 설립자 이냐시오는 가톨릭신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성인이다. 적응주의 선교를 채택한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가 중국식 복식차림을 한 모습의 사진이 로욜라 수도원 식당 로비에 걸려 있다. 로욜라 생가 성지 수도원에는 현재 예수회 신부 55명이 수도중으로 평균 나이 82세다. 유럽의 수도원이 그렇듯 이 곳도 늙어가고 있다. 특히 이 곳에는 이냐시오의 영성수련 과정을 교육하는 영성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연중 만원이다. 이 곳은 가톨릭 성직자 외에 여타 종교인들과 일반인도 찾는다

이 영성센터가 500년이 지난 21세기에 새롭게 각광받는 이유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질 문명과 과학의 비약적 발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실존의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 만큼이나 중요해진 까닭이다.

성지인 로욜라 생가에서부터 큰 깨달음을 얻은 만레사동굴까지 순례길 ‘이냐시오의 길’도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총 길이 650km, 27구간으로 나눠져 있으며 길을 따라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경험할 수 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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