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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아미의 아!美] 나보다 키가 3㎝ 큰 남친의 옷장 이야기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지난 금요일이었습니다. 칼럼 기사 한 건을 온라인에서 삭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벌어졌다기보다, 자행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군요. 기자에게는 치명적, 혹은 치욕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필자인 제가 직접 했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삭제되고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칼럼 기사가 ‘서른 여섯 그녀의 소개팅 복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필자인 저와 그녀, 그리고 저와 그녀를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서른 여섯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사자인 그녀도 “출연료를 내 놔라” 정도로 넘어 갔으니 별 문제는 없어보였습니다.

[자료사진 출처=123RF]

그런데 문제는 네티즌의 댓글이었습니다. “결혼은 포기해라”거나 “재취 자리를 알아봐라”는 식의 댓글이 따라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쓴 칼럼에 이런 댓글이 붙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지요. 기사를 곧바로 내렸습니다.

저의 어리석음을 탓했습니다.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바쁘게 살아가는 서른여섯, 한국의 미혼 여성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란 아직 이런 것이구나.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도 ‘미모 되고, (관리를 잘한 탓에) 몸매 되고, 성격 쿨하고, 직업 좋고, 게다가 전셋집 정도는 가지고 있는’ 미혼의 30대 여성들이 너무나 많은데…. “흔하디 흔한 게 ‘괜찮은 여자’고 귀하디 귀한 게 ‘평범한 남자’”라는 말을 지인들과 자주합니다. 그 정도로 많은 ‘괜찮은 여성’들이 미혼인데, 왜 세상은 그들을 여전히 ‘괜찮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같은 나이의 미혼 남성에 대한 시선은 어떨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서른 여섯, 미혼 남성을 ‘까’보기로 합니다. 저보다 키가 3센치 큰, 제 남친의 옷장 이야기입니다. 

그는 저보다 키가 3센치가 큽니다. 제 키가 170㎝ 정도 되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도 제 키는 중학교 3학년, 163㎝에서 멈춰버렸지요. 다시 말하면 제 남친의 키가 166㎝라는 얘깁니다.

그는 한때 ‘어좁(어깨가 좁은)이’었습니다. 또 다른 전문 용어로 “어깨가 미끄럼틀이다”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운동은 커녕 장시간 음주와 흡연의 나날들을 보내왔지요.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해 두겠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는 검은색 뿔테 안경에 광택이 도는 네이비 컬러 슈트를 입고 짙은 갈색 윙팁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각각은 꽤 나쁘지 않은 아이템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템들이 그에게로 와서는 일제히 삐그덕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작고 왜소한 그의 체형, 작고 까무잡잡한 그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나름대로 동안입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여전히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기에 ‘외모와는 다르게’ 동안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 정색하고 차려입은 수트와 구두는, 동안의 그를 노안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와 조금 가까워진 후, 저는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습관대로, 그의 옷방부터 구경하기 시작했죠. 그의 옷방에는 혼자 사는 삼십대 미혼 남성이 대게 그러하듯, 조립식 철제 행거가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행거에 천 덮개가 없는 건 당연했고요. 세탁소 비닐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한 반년 이상은 먼지를 쌓아온 것 같은 옷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옷들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응칠(응답하라 1997)’ 시대에 유행하던 반팔 줄무늬 ‘폴○’ 남방, 인터넷 쇼핑몰에서 지른 색 바랜 겨울 재킷, SPA 브랜드에서 구입한 똑같은 디자인의 색깔만 다른 티셔츠들….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진 후 저는 그의 옷장에 ‘메스’부터 가하기로 했습니다. 버림으로써 채워지는 미학이랄까요. 안 입는 옷, 못 입은 옷은 죄다 버리기로 한 겁니다. 쓰레기통이 아닌, 재활용 수거함에 버렸으니 너무 질책하진 마시길.

먼저 여름 반팔 남방부터 가차없이 내다 버렸습니다. 가뜩이나 체형이 작은 그에게 품이 큰 반팔 남방은 포대 자루나 마찬가지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깔맞춤’으로 구입한 똑같은 디자인의 SPA브랜드 티셔츠들을 갖다 버렸습니다. 레글런 스타일의 이 티셔츠들은 가끔 스포티하게 입을 수도 있겠지만, 컬러 조합이 애매모호했습니다. 이건 화사하지도 않고 차분하게 톤다운 된 컬러도 아닌, 어디에 매치해야 좋을지 모를 컬러인 겁니다. 마지막으로 색이 바래고 보푸라기가 난 겨울 외투들이었습니다. 한 때 임무를 충실히 다 했으니 이젠 미련없이 안녕입니다. 

[자료사진 출처=123RF]

이제 그의 옷장에는 최소한의 기본 아이템들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흰색 셔츠, 스카이블루 셔츠, 생지 데님(워싱하지 않은 원단 그대로의 청바지), 면 팬츠 등입니다. 여기에 추가로 아이템을 몇 개 더했습니다. 다시 말해 옷 몇벌을 더 사게 만든 거죠. 비싸지 않으면서도 소재가 좋은, 기본 아이템들 말입니다.

흰색 셔츠는 린넨 소재와 옥스퍼드 소재 몇 벌, 그리고 드레스 셔츠를 더했구요. 계절에 따라 이너로 입을 수 있는 흰색, 회색, 검은색 라운드 면 티셔츠를 추가했습니다. 참고로 이너로 입는 면 티셔츠는 사계절에 맞춰 갖추는 것이 유용합니다. 겨울 코트는 캐시미어-모 혼방의 핸드메이드 제품으로 (사 주진 않고) 골라 줬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두 세벌 사 입을 가격으로 소재가 좋은 한 벌의 코트를 구입하게 한 거죠.

무엇보다도 구두 대신 스니커즈를 신게 했습니다. 베이지색 팬츠를 입는 날엔 흰색이나 컬러감이 있는 운동화를 권했고요. 무채색 옷을 입는 날엔 뱀피 패턴이 잔잔하게 들어있는 블랙 컬러의 슬립온을 신게 했죠.

그가 대단한 ‘패셔니스타’가 된 건 아닙니다. 다만 아무리 한 여름이라도 반팔 남방 대신 얇은 린넨 소재의 흰색 셔츠를 걷어 입는 정도의 센스를 갖춘 것이 발전이랄까요. 하지만 그는 요새 “옷 잘 입는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저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신체적 결함(?)은 노력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그를 보고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어깨는 평평해졌고, 배는 단단해졌습니다. 뱃살을 빼기 위해 억지로 굶는다거나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단백질 보충제를 먹은 것도 아닙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나가 신나게 놉니다. 특히 운동을 생활화했습니다. 의자에 앉을 때 자세를 바르게 한다던지, 동네 산책로에 마련된 기구들을 열심히 이용하는 겁니다. 최근에는 술을 줄이고 담배를 끊었군요.

건강한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이 그에게서 작은 기적을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아! 무엇보다도 그는 늘 스스로가 젊다고 생각합니다. 서른 여섯이 아니라, 마흔, 쉰이 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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